1. 페름에 뭐가 있지?
우리가 탄 열차는 끝없이 늘어선 자작나무 풍경에서 침엽수 가득한 타이가 지대의 풍경으로 바뀌더니 예카테린부르크를 기점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선이라는 우랄산맥을 지난다. 고요하게 느껴지는 우랄산맥의 계곡 사이를 달리다가 철로는 어느 순간 실바(Sylba) 강을 끼고 구불구불한 길로 들어서는데 아직 맑은 날이 지속되어서인지 드문드문 낚시꾼들의 모습도 보인다. 창밖으로 나무만이 아닌 사람들이 보이니 새롭다. 하지만 창밖의 이런 아기자기한 경치와는 대조적으로 이 구간에서 커브를 도느라 바쁜 3등칸 플라츠카르트의 삐그덕 거리는 소리는 참으로 요란하다. 이렇게 평화로운 풍경과 요란한 소리의 조합이 적응될 때 즈음 우리가 탄 열차는 2박 3일의 종착지, 페름에 도착한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러시아 Perm 2 기차역 from Wikimedia Commons
“근데 페름에 뭐가 있지?”
우리는 마주 보고 머쓱해서 서로 웃는다.
함께 짜 놓은 여행경로에는 분명 페름이 있는데, 왜 있는 건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예카테린부르크를 더 많이 가던데... 급히 페름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지만, 그 양이 러시아의 다른 주요 도시들에 비해 참으로 적다.
괜찮다.
늘 그렇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없으니까. 쉬엄쉬엄 천천히 보고, 천천히 생각하면 된다.
우랄산맥의 근처, 카마 강 연안에 자리 잡은 페름은 체호프의 4대 희곡인 『세 자매』에서 세 자매가 그토록 떠나고 싶어 하던 지방 도시에 영감을 준 장소이며,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의 배경(주인공 라라가 살았던 곳)이 되기도 한다. 어릴 적 나는 영화 <닥터 지바고>의 포스터 속 털모자를 쓴 두 주인공과 눈 날리는 배경이 바로 러시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는 <닥터 지바고>의 두 배우는 러시아 출신이 아니고, 촬영 장소 또한 핀란드와 스페인이었다)
『닥터 지바고』의 배경지라니. 러시아 전통 현악기인 발랄라이카의 음색이 돋보이던 라라의 테마가 머릿속에서 맴돈다.
2. 닥터 지바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자전적 소설인 『닥터 지바고』는 혁명과 전쟁으로 격동하는 세계를 살아야 했던 한 개인의 삶의 기록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유리 지바고는 전쟁과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는 의사이며 시인이지만, 혁명이라는 물결에 치여 상처 받고 반복되는 전쟁으로 희생되는 동시대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개인일 뿐이다.
소요가 멎는다. 난 무대 위로 나선다.
문설주에 기댄 채
멀리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의 생애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을까.
밤의 어둠이 나를 향해
수천의 쌍안경 눈알처럼 응시한다.
제발, 하나님 아버지 나의 곁에서
부디 이 술잔을 가져가 주소서.
나는 당신의 꿋꿋한 뜻을 사랑하며
맡겨진 이 역할들을 기꺼이 수락합니다.
그러나 지금 다른 연극이 상연되고 있으니
이번만는 나를 그대로 있게 하소서.
하지만 연극의 순서는 이미 정해진 것
마지막 길은 피할 수 없다.
나는 외롭다, 세상엔 득실거리는 바리새 사람들뿐.
산다는 것은 들판을 지나듯 되지는 않는다.
-유리 지바고의 시 <햄 릿>
소설 속 주인공이라기엔 나약해 보일 수 있는 지바고는 자신이 있는 곳에 언제 누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도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전쟁과 혁명이 생활인 시대에 개인의 자유와 예술혼을 지키는 것은 모든 예술인에게 힘든 여정이었을 것이다. 혁명가들에게는 비겁한 회색분자로 보였겠지만, 유리 지바고가 원하는 것은 시를 쓸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는 개인의 자유였다. 그의 시는 어두운 외로움과 은둔의 생활이 담겨 있고, 그의 성격을 꼭 닮아 소극적이지만, 이데올로기의 폭력과 맞서는 깊이를 가진다. 유리 지바고의 시는 “자유”를 향한 보이지 않는 투쟁이었던 셈이다.
러시아의 시인이자 소설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from Wikimedia Commons
3. 페름에 가려던 이유
오늘날 페름은 국제적 문화, 예술도시로써 흥미롭고 다양한 박물관과 미술관, 교육기관, 문화적 명소들이 자리한다. 특히, 페름 국립 발레 학교는 볼쇼이, 바가노바와 함께 러시아의 3대 발레 학교로 유명하기도 하다. 모스크바 볼쇼이 발레단에서 활동하는 발레리나가 대부분 이 학교 출신이다.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인 차이콥스키를 기념하여 지어진 '페름 차이콥스키 오페라 및 발레 극장'(Perm Tchaikovsky Opera and Ballet Theatre)은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중 하나로 차이콥스키의 작품을 모두 공연한 페름의 중요한 장소이다.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중 하나인 "페름 차이콥스키 오페라 & 발레 극장" from Wikimedia Commons ⓒ D V S
이제야 생각이 났다.
우리가 페름에 가자고 했던 이유. 바로 “발레” 때문이었다.
발레는 유럽에서 발생한 무용 예술이지만 오늘날의 발레로 발전시킨 것은 러시아이다. 러시아는 자녀에게 자연스럽게 발레부터 가르치는 나라이고, 무용수를 정치인으로 등용하는 나라이며, 발레를 보는 것이 삶의 일부이고 즐거움인 나라이다.
나는 발레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내가 본 발레라고는 영화 속 장면들 뿐이지만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의 마지막 장면, “백조의 호수” 음악을 배경으로 발레리노 애덤 쿠퍼가 공중을 향해 힘껏 날아오르는 장면은 내가 본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하고 싶은데 빌리, 춤출 때 어떤 기분이니?”
“모르겠어요. 그냥 기분이 좋아요. 긴장되기도 하지만 일단 추기 시작하면 모든 걸 잊어버려요. 그리고... 사라져 버려요.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요. 내 몸 전체가 변하는 기분이죠. 마치 몸에 불이라도 붙어서 그저...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나는 것 같아요. 마치 감전된 것처럼... 네... 전기처럼요."
-영화 <빌리 엘리어트> 오디션 장면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나는 것 같아요. 마치 감전된 것처럼... "- 영화 <빌리 엘리어트>
4. 키워드 황당 여행 - 백조의 호수
우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시어터의 첫 내한공연 <백조의 호수>를 관람하기 위해 세종문화회관을 찾았다. <백조의 호수>는 차이콥스키의 발레 음악 데뷔작이자 클래식 발레의 대명사이다. 처음 등장했을 때 춤을 위한 반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외면을 받기도 했지만, 후에 인기를 끌며 춤에 종속돼있던 발레 음악이 처음으로 춤과 대등한 위상을 가지게 되는 계기를 만든 작품이다. 발레도 발레지만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오케스트라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설레는 일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발레 씨어터(SPBT)의 첫 내한공연 <백조의 호수>
줄거리는 지크프리트 왕자가 악마의 저주를 받아 낮에는 백조로, 밤에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오데트 공주를 만나게 되고, 영원한 사랑으로 그 저주를 풀 수 있다는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한 옛날 동화이지만 차이콥스키 음악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선율과 디테일한 안무, 연기가 만나 신비롭고 화려한 무대를 만들어낸다.
발레는 시각적 예술이기 때문에 보는 이의 눈이 즐거워야 하고 따라서 신체적으로, 체력적으로 선택받은 댄서들의 수많은 땀과 훈련으로 완성된다.
<백조의 호수>는 그중에서도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고전발레이고, 고전 발레의 형식적 특징을 모두 담아 다양하고 화려한 발레 기술들을 펼친다. 특히, 완벽히 다른 분위기의 1인 2역을 해내는 오데트(백조)/오딜(흑조) 역은 발레리나에게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면서도 큰 만족감과 보람을 주는 역할이다.
오늘 공연에서 오데트/오딜 역을 맡은 이리나 콜레스니코바의 큰 키와 긴 팔다리는 우아한 백조와 관능미 넘치는 흑조의 모습을 모두 소화하며 관객의 감탄과 박수를 끌어냈다. 첫 발레 감상인 내게 댄서들의 기술이나 다양한 안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들의 근육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마치 그들의 하루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영화 <블랙스완>에서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자아분열의 고통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무대에 서기까지, 이 아름다움을 표현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과 노력이 있었을까. 커튼콜에서도 몇 번씩이나 지치지 않고 포즈를 취하며 관객들의 박수와 환성에 응답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뜬금없이 오늘 밤은 공연자들 모두가 숙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번이나 포즈를 취하며 관객들의 박수와 환성에 응답하는 댄서들
발레를 보고 돌아가는 길에는 나도 모르게 자꾸만 발끝이 세워졌다. 공중으로 점프하며 발을 푸드득 교차하던 자세(앙트르샤:entrechat)가 생각나 점프를 하며 발을 움직여 보려 하는데 발 대신 팔이 푸드득 움직여진다.
그래, 춤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지.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방유랑 경음악단의 <시베리아 황당열차>는 2주에 한 번 업데이트됩니다.
가상여행과 함께 창작된 음악도 함께 올려집니다. .
브런치에 연재된 글은 낭독 버전으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사운드클라우드, 네이버 오디오캐스트, 유튜브)
유튜브 낭독: https://youtu.be/FzowOKLzZz4
사운드클라우드 낭독: https://soundcloud.com/bangyurang/8a-1
사운드클라우드 사운드트랙: https://soundcloud.com/bangyurang/8a-2
네이버 오디오클립 낭독: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431/clips/16
네이버 오디오클립 사운드트랙: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431/clips/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