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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유랑경음악단 Oct 16. 2019

9회 자유를 향한 자유의 몸짓,  현대무용

새봄


1.인류세의 페름에서


페름은 러시아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자주 선택되는 여행지는 아니지만 그 이름은 어딘지 낯설지가 않다. 고생대 마지막인 페름기가 바로 이 지역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호텔 로비에 앉아 오늘 찾아가게 될 페름-36 관련 정보를 검색하다, 갑자기 생물시간에 배웠던 내용이 어렴풋이 떠올라 페름기 대멸종을 검색창에 입력해보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페름기는 지구 역사상 최대의 멸종이 일어난 시기이다. 그렇다. 약 2억 5천만 년 전 고생대 페름기말에는 지구 상의 동식물 95%가 떼죽음을 당하는 대멸종이 일어났으며 중생대 초기인 트라이아스기까지 500만 년 동안 “생명의 사각지대”가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멸종의 주요 원인은 지구 온난화라는 게 학계의 최신 정설이다. 35도가 넘어가면 식물은 광합성을 멈추고 40도가 넘어가면 죽기 시작한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기온을 조절하는 식물의 죽음은 걷잡을 수 없는 기온 상승의 악순환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기후 위기 앞에 선 지금과 페름기말이 겹쳐지는 건 너무 과한 상상일까. 지난 2000년 네델란드의 과학자 크뤼천은 지질시대 분류에서 인류세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인류세는 인류의 자연환경 파괴로 지구의 환경체제가 급변하게 된 시대를 뜻한다. 시대 순서로는 신생대 제4기의 홍적세와 현세인 충적세에 이은 것이다. 인류세는 새로운 페름기인 걸까? 16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의 절망과 분노에 찬 외침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생태계 전체가 무너지고, 대규모 멸종이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들은 돈과 영원한 경제 성장이라는 이야기만 늘어놓을 수 있나요”

https://youtu.be/BvF8yG7G3mU


호텔 프론트 직원이 우리를 부른다. 페름-36 원데이 투어 버스가 도착했다. 오늘은 구소련의 강제 노동수용소를 보존해 놓은 페름-36을 찾아가기로 했다. 유쾌하지 않은 역사 현장 방문에 앞서 다른 이유로 마음이 먼저 무거워진다.



2. 마지막 굴라크, 페름-36

페름-36의 메인 건물ⓒGerald Praschl

빛바랜듯한 풍경을 두 시간 정도 달려 페름-36에 도착했다. 페름-36은 현재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구소련의 집단 강제 노동수용소이다. 굴라크(Gulag)라고 지칭되는 강제 노동수용소는 러시아 혁명 이후에 처음 등장했으나 스탈린이 농업집단화와 대규모 정치 숙청을 시작한 1930년대부터 조직적으로 대규모화되었다. 주로 정치범들을 구금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 포로나 외국인, 그리고 일반 죄수도 수용되었다. 대부분 정당한 사법 절차는커녕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즉결 심판에 넘겨져 끌려왔으며,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중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1920년대부터 1955년까지의 시기에 대략 1,400만 명이 전국 각지의 굴라크에 수감되었으며, 6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 이주 및 국외 추방을 당했다. 이중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된 한국인 군인과 노동자들, 구소련 체제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과 한국 출신의 볼셰비키 혁명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수감자중 최소 160만, 최대 천만명이 굴라크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페름-36의 펜스 ⓒGerald Praschl

페름-36은 페름에서 동쪽으로 100Km 떨어진 추소보이(Chusovoy) 인근에 위치해 있다. 1947년에 지어져 1987년까지 운영되었으며, 지금은 굴라크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탈바꿈해 보존되고 있다.

짙은 녹색의 육중한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니 정말 수용소에 끌려가는 듯 가슴이 철렁한다. 철문을 들어서니 또 다른 담장과 높은 감시초소가 이어지고 저 너머로 남루하고 처량한 삼각 지붕의 건물들이 보인다. 수용소는 다섯 겹의 높다란 철책으로 꽁꽁 둘러 싸여있으며, 중무장한 병사들과 경비견이 밤낮으로 삼엄한 경비를 섰고 땅밑에는 감지 장치까지 매립 설치했었다 한다. 누구든 탈출에서 발각되면 즉결 처형되었다. 운이 좋아 죽지 않고 형량을 마치더라도 집에 돌아가는 것은 요원했다. 대신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로 보내져 감시 하에 처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난방은 꿈도 못 꿀 일이고 제대로 된 의복도 지급되지 않았으며, 음식은 매끼 손바닥만 한 가벼운 빵덩이와 멀건 죽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끔찍한 중노동이 쉬지 않고 이어져 대부분이 건강을 해치거나,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보이는 풍경만으로도 어쩌면 이렇게 우울하고 스산할까.


페름-36의 수용소 내부  ⓒGerald Praschl

수용소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가이드는 페름-36 원데이 투어에 참여한 6명의 관광객에게 분명하고 쉬운 러시아 액센트 영어로 페름-36 집단 노동수용소의 끔찍한 하루를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 없이도 앙상한 나무 이층 침대 외에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취침실은 서 있는 것만으로 오한을 들 정도였다. 이 좁은 곳에서 60여 명의 수감자들은 매트리스나 담요도 없이 지냈다고 한다. 나는 두툼한 점퍼를 입고 있었다. 다른 관광객들 모두 겨울옷 차림이었다.   


페름-36의 징벌방 ⓒ Wulfstan

다음 징벌방은 더욱 끔찍했다. 무리 이탈, 불성실한 대답, 의복이 단정하지 않다는 등등의 이유로 지적받은 사람은 이곳에 15일간 격리되었다고 한다. 겨우 1미터 50센티쯤으로 보이는. 서로 마주 보는 딱딱한 나무 이층 침대로 이미 꽉 찬 방은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식탁과 작은 창문, 차디찬 돌바닥이 전부였다. 수감자들은 이곳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한다. 수감자용 화장실은 더욱 가관이었다. 화변이 하나와 정말 초라한 수도 시설, 무엇보다 문이 없다.  

자세한 설명이 덧붙어진 꽤 많은 사진과 자료들도 둘러보고 밖에 나오니 1996년에 세워졌다는 위령탑이 있다. 돌로 된 기다란 비석에는 이곳에서 희생된 2만여 명의 희생자 이름이 빼곡하다. 그 이름을 따라가다 보니, 낯선 키릴 문자 사이로 한국인의 이름들도 꽤 보인다.



3. 거의 행복하기까지 한 수용소에서의 하루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2차 세계대전 중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된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의 하루를 그린 작품이다. 반정부 활동으로 8년간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작가 자신의 경험이 반영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얼굴이 찢어질 듯한 추위 속에서 중노동을 하고, 죽 한 그릇 더 얻어먹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영창에 가게 될까 전전긍긍하는 굴라크에서의 비참한 하루는 너무나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그래서 더욱 처절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4 ⓒ Verhoeff, Bert

“영창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사회주의 단지’로 추방되지도 않았다. 점심 때는 죽 그릇 수를 속여 두 그릇이나 얻어먹었다. 작업량 사정도 반장이 적당히 해결한 모양이다. 오후에는 신바람 나게 벽돌을 쌓아 올렸다. 줄칼 토막도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기다려주고 많은 벌이를 했다. 담배도 사 왔다. 병에 걸린 줄만 알았던 몸도 거뜬하게 풀렸다. 이렇게 하루가, 우울하고 불쾌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의 행복하기까지 한 하루가 지나갔다.” -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중에서



4. 자유를  향한 자유의 몸짓, 현대무용

전제 군주와 주교, 자본가들을 쓸어내는 레닌, 1920년 정치만화 포스터 ⓒViktor Deni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획득한다면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공동체가 등장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혁명은 억압과 수탈에 시달리는 노동자와 농민을 전제군주제에서 해방하고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혁명이었다. 그러나, 인간 해방을 부르짖던 사회주의자들은 그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짓밟고 희생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것도 거대한 규모로. 끔직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자유를 위한 억압이라는 정교한 아이러니는 예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우리가 관람했던 <백조의 호수>와 같은 고전발레 댄서들은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한 몸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연습과 다이어트로 스스로를 혹사하고 구속한다. 괴로운 수련 과정 속에서도 그 목적과 동기를 잃지 않은 정신력의 소유자라면 극기의 기쁨과 함께 최고의 예술을 구현할 수 있겠지만, 발레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워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예술 장르이다. 아니 그렇게 목적지어졌다.  타고난 신체 조건 역시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의 아름다음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 자연스러운 몸과 신체 조건을 구속하고 기술적 숙련의 완성도만을 강조하는 고전 발레의 이러한 유미주의 경향은 반발을 불러왔다.     

<백조의 호수> 2막 백조들의 군무 ⓒ Paata Vardanashvili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고개를 들기 시작한 현대무용은 유미주의만을 강조하는 고전발레와는 달리 규정된 형식이나 기교를 떠나 자유롭고 개성적인 표현을 강조하는 무용 양식이다. 현대 무용의 창시자 중 하나인 이사도라 덩컨과 루스 세인트 데니스(Ruth St. Denis) 등은 체계적인 훈련보다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했고, 평범하면서도 즉흥적인 몸짓을 개발했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움직임은 춤이다”라는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의 실험 무용까지 이어진다.  

라반 스쿨의 댄서, 베를린 1929년 ⓒAus dem Coreographischen Institut Laban in Berlin-Grunewald! Schönheit im Tanz




5. 최고의 발레리노가 추는 현대무용, <댄서>


<댄서>. 2016, Steven Cantor 감독

다큐멘터리 <댄서>는 희생과 고통, 그리고 그로 인한 예술적 성취가 공존하는 세계적인 발레리노의 삶을 그린다. 19세로 영국 로열 발레단의 최연소 수석 무용수로 발탁된 우크라이나 출신, 세르게이 폴루닌은 뛰어난 테크닉과 타고난 재능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지만 2년 만에 돌연 탈단을 하고 만다. 연습에 빠지고 공연 전날 사라지거나,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약물 스캔들에 휘말리던 폴루닌의 아름다운 몸과 춤 이면에는 눈물과 고통이 숨겨져 있었다. 영화는 엄격한 통제가 이어졌던 어린 시절, 그의 학비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사, 10살이 갓 넘은 나이에 타국에서 홀로 이를 악물고 발레 연습에만 매진해야 했던 사연이 그려진다. 어머니는 폴루닌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최고의 무용수로 선 폴루닌은 어머니의 의사가 아닌 자신의 눈으로 그의 삶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고통스러운 연습과 끊임없는 자기 관리라는 억압이 진정한 자유를 위한 과정임을 납득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춤을 선택한 폴루닌은 진정한 댄서로 거듭나 그 자신 뿐 아니라, 가족과도 화해한다.  


“Take Me to Church”에 맞춰 춤추는 세르게이 폴루닌의 모습은 감동적이고 극적이며 자유롭다. 이제 그의 춤은 온전히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춤은 아름다운 현대무용의 한 장면이다. 한때 최고의 발레리노였던 이가 발레의 형식과 기교를 넘어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현대 무용이 어딨을까?

https://youtu.be/c-tW0CkvdDI

Sergei Polunin, "Take Me to Church" by Hozier, Directed by David LaChapelle


결국, 고통이든 쾌락이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지가,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자유라는 생각을 해본다. 페름-36의 희생자들에 대한 짧은 묵념을 하며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떤  명목으로도 개인의 자유를 빼앗는 체제나 정권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누구도 인간이 인간으로 누려야 할 존엄과 자유를 훼손할 수는 없다. 기후 평등과 정의 또한 그렇다. 우리는 우리 다음 세대에게 기후 위기가 초래할 위험을 떠넘겨 버릴 수는 없다. 이것은 개인과 국가를 넘은 인류의 문제이다. 우리는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해야 할까. 툰베리의 연설, 페름-36과 그리고 고통을 넘어 자유를 향한 폴루닌의 몸짓이 묘하게 엃혀 맴도는 하루다.     



방유랑 경음악단의 <시베리아 황당열차>는 2주에 한 번 업데이트됩니다.

가상여행과 함께 창작된 음악도 함께 올려집니다. (사운드클라우드, 오디오캐스트, 유튜브)

브런치에 연재된 글은 낭독 버전으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네이버 오디오캐스트, 유튜브)


유튜브 낭독 https://youtu.be/ZaZp3PeKOMc

유튜브 사운드트랙 https://youtu.be/MGzeot-tWsU


사운드클라우드 사운드트랙 https://soundcloud.com/bangyurang/9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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