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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유랑경음악단 Oct 29. 2019

10회 콤포지션 모스크바

미옹

1.   모스크바행 열차


다시 기차역이다.
우리가 예매한 기차는 페름에서 21시간을 달려 모스크바 야로슬랍스키 역에 도착한다.
이미 기차 안에서 여러 날의 낮과 밤을 경험했는데도, 모스크바로 이동하기 전 나는 엄살을 부리며 러시아 저가 항공의 노선과 가격을 찾아보았다.

페름에서 모스크바까지 비행기로 약 2시간. 가격은 약 10만 원 안팎이다. 모스크바까지 기차로 가는 것에 비해 1/10밖에 안 되는 시간에 너무나도 마음이 동하지만, 가격도 가격이고 지구 둘레의 1/4을 달리는 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 구간의 마무리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기차에 올랐다. 천천히 이동하는 것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묘미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왠지 더 편하고 빠르게 이동하는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내 모습에 피식 멋쩍은 웃음이 난다.

마음을 가다듬고 처음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오르던 때의 설렘을 떠올리며, 모스크바로 향하는 21시간을 맞이한다.


페름 주변 카마 강의 경치 By William Heusmann (Wikimedia Commons)


기차는 우랄산맥 지역의 조금씩 보이는 소나무 숲, 자작나무의 소소한 풍경과 헤어지고 색이 아름다운 통나무 집들을 보여주기도 하다가 밤이 지나고 아침 햇살이 비칠 때 즈음 푸른빛의 강물을 보여주며 기분 좋은 시간을 만들어준다. 소도시들을 지나며 모스크바까지 약 13km 정도 남겨두고 기차는 모스크바 순환도로를 가로지르는데, 이 구간은 『모스크바발 페트슈키행 열차』로 유명해진 철로이다.


2.   소비에트의 현실과 알코올 중독


『모스크바발 페트슈키행 열차』는 베네딕트 예로페예프(1938~1990)의 대표작이자 소비에트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페트슈키"는 우리에게 매우 낯선 지명인데, 모스크바 동쪽으로 115㎞ 떨어진 클랴즈마 강가의 소도시로 모스크바에서 출발하는 철도 교외선의 종착지이다. 이 작품은 금주 정책이 시행되던 고르바초프 시절의 이야기로, 주인공 베니치카는 오직 가방 하나만 지닌 채로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알코올 중독자다. 사랑하는 아들과 여인이 있는 페트슈키에 가기 위해 페트슈키행 열차에 올라 끊임없이 술을 마시며 동행하는 사람들과 문학, 예술, 종교, 철학, 정치 등에 대한 대화, 그리고 독백을 펼친다. 그는 매니큐어나 치아 특효약, 세정제, 방충제 등이 레시피에 들어가는 듣도 보도 못한 술들을 만들어 마시기도 하고, 점점 더 취하면서 꿈인지 환각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다가 결국 페트슈키가 아닌 모스크바 크렘린 근처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결국 익명의 네 사람에게 린치를 당하고 쫓기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Begi, Venichka, begi!”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 By Alexander Sapozhnikov (Wikimedia Common)


"그들은 술 없이는 한 줄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읽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절망적으로 술을 마셨던 겁니다! 러시아의 모든 정직한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은 술을 마신 걸까요? 절망 때문에 마신 겁니다. 그들은 정직했기 때문에, 민중의 짐을 덜어 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마신 겁니다! 민중은 가난과 몽매로 숨 막혀하고 있었습니다! 드미트리 피사레프를 읽어 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썼어요. '민중은 쇠고기를 먹을 수 없다. 그런데 보드카는 쇠고기보다 값이 싸고, 이 때문에 러시아의 농부는 술을 마신다. 가난 때문에 마시는 것이다! 그는 책을 읽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시장에는 고골이나 벨린스키의 책은 없고, 있는 것이라곤 보드카뿐이기 때문이다. 정부 독점의 보드카, 그리고 각종 보드카, 그 자리에서 마시는 보드카, 그리고 사가서 마시는 보드카 등등! 그래서 그는 술을 마신다. 몽매로 인해 술을 마시는 것이다.'"    - 베네딕트 예로페예프  『모스크바발 페트슈키행 열차』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나는 술에 취해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같은 애주가로서 애정 담긴 가벼운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책장이 넘어갈수록 나 역시 같이 취해가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껴 책을 덮었다 펼쳤다 반복하였다. 재미있었던 점은 모스크바발 페트슈키행 열차가 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걸리는 시간이 2시간 30분인데 책을 다 읽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묘하게 비슷해서 마치 실시간으로 주인공이 탄 열차의 동행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가 제조한 술은 한 방울도 같이 마시고 싶지 않았다.)  


모스크바 쿤스크 묘지에 있는 저자의 무덤 By Сергей Семёнов (User:Stauffenberg) , (Wikimedia Common)


작가 예르페예프는 실제로 알코올 중독자였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고정된 거처 없이 불안정하게 살았다. 알코올 중독은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쳤고, 사후 그의 신화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상당한 원인을 제공했는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통이 아니라 창조적 원천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를 둘러싼 현실 또한 고통과 슬픔의 원천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작가의 특별한 풍자적 재능에 기여했다고 얘기된다. 책에서도 내내 알코올의 미덕과 소비에트 생활 방식의 사악함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부패가 만연하고 범죄가 증가하며 알코올 중독자들이 거리에 넘쳐났던 당시의 러시아인들과 함께 합석한 느낌도 그리 나쁘진 않았지만, 모스크바에 도착하기 전 빨리 술을 깨고 싶다.


3.   모스크바의 지하철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이후 9천여 킬로미터를 달렸고, 7개의 시간 변경 선을 지났으며, 87개 도시와 63개의 기차역을 지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일정이 남아있지만, 정확히 "시베리아 횡단철도" 모든 구간을 모두 달린 것이다. 야호!


야로슬랍스키 기차역 By S. Stepasyuk (Wikimedia Commons)


우리가 도착한 역은 야로슬랍스키 역으로 모스크바는 세 개의 기차역이 있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한 기차는 레닌그라드스키 역에, 동부에서 출발한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카잔스키 또는 야로슬랍스키 역에 도착한다. 세 기차역 모두 콤소몰스카야 광장 인근에 자리하고 지하철역과 가까워 이동이 편리하다.

모스크바에서의 여행은 대부분 붉은 광장으로 시작하지만, 우리의 숙소는 고리키 공원 근처이고, 모스크바의 10월 말은 하루하루 낮이 점점 짧아지므로 평소보다 조금 부지런히 움직여본다.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꾸민 호화로운 "지하궁전"이라 불리는 모스크바 지하철은 단순한 대중교통 수단을 넘어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대의 인상적인 예술작품들로 가득 찬 특별한 장소다. 모스크바 지하철은 하루에 7백만 명 이상의 승객을 수송하는 엄청난 이용객과 거대한 규모로도 유명하다. 모든 역의 내부 장식이 완전히 다르고, 역마다의 개성과 함께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며놓았기 때문에 모스크바 시민의 자랑이기도 하다.


콤소몰스카야 역은 세 개의 기차역 광장을 통해 모스크바에 첫인상을 선사하는 지하철역으로 모스크바에서 가장 활기찬 교통 중심지 중 하나이자 모스크바의 관문이다. 이 역은 스탈린 시대에 유래한 모스크바 지하철의 제국 양식에서 절정을 이루고 러시아 혁명 이전부터 사용됐던 모스크바 바로크 모티브들로 꾸며져 있다.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듣던 대로 정말 깊고, 화려하고, 거대하구나.


모스크바 지하철 콤스몰스카야 역 By A.Savin (Wikimedia Commons · WikiPhotoSpace)


4.   고리키 공원


우리는 옥탸브리스카야 역에 내려 고리키 공원으로 향한다.
러시아의 대문호 막심 고리키의 이름을 딴 고리키 공원은 모스크바의 중앙 공원으로 모스크바 강을 따라 걸으면 3㎞나 이어지는 약 36만 평의 거대한 공원이다. 이곳은 산책과 데이트 장소임은 물론, 비치발리볼, 오리 보트 등의 레저를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며, 무료 요가나 댄스의 강연이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다.


거대한 아치형 석문의 공원 입구를 지나면 펼쳐지는 나무들과 호수를 배경으로 개성 넘치는 복장의 유쾌한 젊은이들과 휴식을 즐기는 모스크바의 시민들의 모습이 활기차게 공원을 채운다.


넓은 잔디밭 곳곳에는 눈에 띄는 색상의 쿠션들이 있는데 이 쿠션에 누워 책을 읽는 사람들, 잠을 자는 사람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 우리도 어슬렁어슬렁 그들 사이를 지나며 빈 쿠션을 찾아 누워본다. 이곳에서는 돗자리가 없어도 누울 수 있구나. 이곳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으로 여유 있어 보인다. 남산공원과 한강공원을 사랑하는 나이지만, 도심 속에 자리 잡은 이런 큰 공원을 볼 때면 늘 부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고리키 공원 메인 입구


5.   트레티아코프 미술관 신관 


고리키 공원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신관은 20세기 러시아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다. 나는 여행에서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을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웬일인지 모스크바에서는 칸딘스키의 작품이 꼭 보고 싶었다.


우리가 흔히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라 부르는 곳은 11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러시아 화가들의 작품이 주로 전시된 곳으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구관에 해당하고, 칸딘스키와 같은 20세기 이후 러시아 출신 현대 화가들의 작품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신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관과 신관은 거리가 다소 떨어져 있는 별개의 건물이고 수많은 작품이 있는 모스크바의 대표적인 미술관들이니 시간을 넉넉히 가지고 둘러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루에 미술관을 두 곳이나 갈 의지가 없고, 칸딘스키가 미술관을 결심하게 한 목표였으니 고민 없이 신관으로 향한다.


뉴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By Tretyakovgallery (Wikimedia Commons)


감각적인 미술관 로비를 지나 이어지는 각 전시실은 저마다의 느낌과 색으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실을 옮기며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작품을 조금씩 속도를 내며 지나기도 하고 각자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서는 한참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칸딘스키의 작품을 만난다.


6.  칸딘스키의 구성(composition)


러시아 태생의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20세기 추상미술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그는 예술가라는 이미지나 고정관념에 부합되지 않는 정장 차림에 다소 인상이 차가워 보이는 코안경을 끼고 다녔는데, 자신을 아름답고 평화로웠던 '벨 에포크' 시대에서 온 신사라고 여겼다.
칸딘스키는 겉으로는 침착하지만 실제로는 예민하고 까칠한 사람이었으며, 그러한 성향은 근대의 가장 훌륭한 작품들을 창조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바실리 칸딘스키 (1866-1944)) By 未知上傳者, Public Domain


인상(impression), 즉흥(improvisation), 구성(composition)의 연작들은 그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게 한 대표작으로 볼 수 있는데, ‘인상 Impression’은 외부 자연으로부터의 즉각적인 느낌이고, 즉흥은 칸딘스키의 내면세계에서 온 경험과 감정, 구성은 칸딘스키가 지은 교향곡 같은 작품으로 그의 작업과 사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칸딘스키의 작품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그의 작품이 음악에서 아주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음악이 소리로 청중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처럼 회화에서도 대상을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었다. 그는 뛰어난 공감각의 소유자였고, 평생을 소리가 그의 정신에 그려 넣은 강렬한 색상과 이미지들을 자신의 작품에 표현했다.


바실리 칸딘스키, 1913 - 구성 7(Composition 7) By Wassily Kandinsky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림에서 마치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는 평가를 받는 칸딘스키의 작품 앞에 서서 이 다양한 형태와 색채의 기하학적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음악 소리는 어떤 것일까 상상해보았다.

코안경을 쓴 지휘자가 개성 넘치는 도형들과 하나씩 눈을 마주치며 오케스트라 곡을 연주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칸딘스키가 지휘하는 음악이 어떤 음악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받은 이 느낌을 음악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칸딘스키처럼 우리도 우리가 본 모든 것들,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모든 것일 필요는 없지. 표현하고 싶은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다면 좋겠다.


"색은 건반의 역할을 한다. 사람의 눈이 피아노의 현을 때리는 해머라면, 영혼은 모든 현을 갖고 있는 피아노 그 자체다. 예술가는 건반을 눌러 연주하는 손으로, 영혼의 떨림을 이끌어 낸다."    -바실리 칸딘스키


칸딘스키와 수많은 러시아 출신 화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보고 나오니 밖은 어느덧 어두워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강에 번져있는 불빛과 강 주변 건물들의 빛은 밤의 짙음과 함께 조금씩 더 선명해져 이 도시를 황홀한 색채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래, 우린 지금 모스크바에 있구나.


모스크바 강 주변 야경 모습



방유랑 경음악단의 <시베리아 황당열차>는 2주에 한 번 업데이트됩니다.

가상여행과 함께 창작된 음악도 함께 올려집니다. (사운드클라우드, 오디오캐스트, 유튜브)

브런치에 연재된 글은 낭독 버전으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네이버 오디오캐스트, 유튜브)


유튜브 낭독 https://youtu.be/TbcAoKkcFGI

유튜브 사운드트랙 https://youtu.be/qTwwTtouMiE


사운드클라우드 사운드트랙 https://soundcloud.com/bangyurang/10a


네이버 오디오클립 낭독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431/clips/20

네이버 오디오클립 사운드트랙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431/clips/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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