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인 마닐라

by 바닐라

그 모양새 또한 얼마나 동글동글 귀여우며 균형미까지 갖추고 있지 않았던가, 2020이란 숫자는.

2020년 그 첫 달에 나는 싱가포르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아들을 보러 갔다가 돌아와 기분 좋은 한 해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우한이라는 생소한 도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고, 화교들이 꽤 많은 싱가포르에도 환자가 생겼으며, 심지어 내가 싱가포르에 머무는 동안 그 동선이 겹쳤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들에게 얼른 마스크를 사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아빠, 벌써 약국마다 마스크가 별로 없어. 여러 군데 돌아다녀서 겨우 스무 장쯤 구했어”

“ㅋㅋ, 그 정도로 충분해. 길어도 두 달 안에는 정리될 거야, 이 상황들이. 걱정 마”

이렇게 두 부자는 가족 채팅방에서 대화를 나눴다.


나 또한 그럴 거라 믿었으며 또 바랬다.

그러면서도 순간 저 대화가 어떤 재난 영화의 복선마냥 느껴져서 잠깐 오싹했다.

영화의 많은 장면에서 또는 원대히 보자면 역사의 많은 사건들 속에서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곧 닥칠 엄청난 파도는 꿈에도 모른 채 저렇게 서로를 안심시키느라 애썼겠지 하는 허무맹랑한(그 당시 생각으로는) 상상을 했었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그 파도는 위세가 더 당당해지나 싶더니 급기야 온 세상을 뒤덮었다.

내가 있는 이곳, 마닐라는 치안, 위생 같은 면에서 아무래도 시스템적으로 좀 뒤처지는 편이다 보니

코로나라는 파도를 헤쳐 나가기에는 여러 가지로 더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결국 배짱과 과격이 트레이드 마크이신 이 나라 대통령은 3월에 들어서며 모든 성문을 닫으라고 지시했다.

국제선은 물론이고 국내선 비행기도 날개를 접어야 했고, 섬들을 소통케 하던 배편도 기적소리를 멈췄다.

생필품을 파는 슈퍼마켓들을 제외하고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시민들은 저녁 8시 이후에는 집 밖을 나갈 수도 없었다.

각 집마다 통행허가증이 한 장씩 배부되었다.

그 허가증 없이는 슈퍼마켓도 드나들 수 없었는데, 한 사람당 한 장씩 지니고 있어야 했기에 한 집에서 두 명이 동시에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거센 파도 정도가 아니었다.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쓰나미였다.



필리핀은 3월부터가 건기이자 한여름이어서 대낮에는 체감온도가 40도 가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코로나라는 무시무시하고 불투명한 존재는 그 한여름에 간담이 서늘해지게 만드는 공포영화였다.

봉쇄가 길어질수록 가장 힘든 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아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시골 고향에서 돈 벌러 마닐라로 나왔던 젊은 청년들이 일자리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일이 자꾸 늘어났다.

말 그대로 그들은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배고파서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 집에는 집안일을 도와주며 같이 살고 있는 ‘린’이라는 헬퍼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녀의 이복 남동생도 결국 돈 한 푼 생기지 않는 마닐라 생활을 청산하고 어렵게 어렵게 귀향했다 했다.


그런데 엄동설한 같던 초강력 봉쇄가 두어달쯤 지나 조금씩 풀려갈 무렵, 너무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고향에서 할머니의 사탕수수 농사를 돕고 있던 린의 남동생이 그만 죽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었다. 싸구려 마약에 취한 동네 친구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를 해한 것이다.

그 날 그곳의 태양이 너무 뜨거웠을까. 코로나가 준 무료함이 너무 지독했을까.

까뮈 소설 이방인의 뫼르소도 아니면서 어찌 그리 허무한 살인을 저지른 것인지, 그 XX는.



겨우 스물대여섯의 나이에 참 인생 굴곡 많은 린은 동생의 장례식을 위해 고향으로 떠났다.

겨우 예약했던 비행기도 취소되고, 배편도 없어서, 친척의 사돈팔촌쯤 되는 사람의 화물트럭을 겨우 얻어 타고 갔다.



그녀가 떠나고 난 후, 마당 한 켠에 있는 화분에서 넝쿨 같은 모양의 싹이 올라와 자라고 있는 것을 봤다.

싹은 틔웠으나 잎이 튼튼해 보이지도 않았고 강한 햇살 때문인지 군데군데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린이 심어놓고 간 수박씨였다.


2,3주 전쯤 수박을 사 와 먹었었는데 린은 그때 나에게 태어나 수박을 처음 먹어보는 거라고 했다.

커다란 몸통 속, 조그만 까만 수박씨를 신기해하더니 ‘수박이 그렇게 쉽게 열리겠어’ 하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심어놓은 것이었다.


린은 뭘 심는 걸 즐겨했다. 동네 친구에게 얻어왔다며 라부요라는 아주 매운 필리핀 고추씨를 심기도 하고, 내가 파뿌리를 잘라 버리는 것을 보고는 그 뿌리를 심어놓기도 했다.

너무 강한 햇빛과 해충들 탓에 수확이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별 실망하는 기색도 없었다.

아니 심을 때부터 그리 큰 기대를 안 하는 것 같았다.

그저 “나의 정원, 나의 식물들”이라며 짧은 영어로 나에게 손짓하며 땀 맺힌 얼굴로 해맑게 웃곤 했었다.



연중 따갑게 쏟아지는, 신의 축복임과 동시에 그들의 원초적 고난이기도 한 태양볕, 그리고 해충 약을 사서 뿌릴 돈이 없어서 필리핀산 채소는 모두 유기농이게 만드는 불가항력 가난.

이런 것들을 그녀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시도해 볼 뿐이었다.



수박이 열리지 않으리란 걸 안다. 그리고 그녀가 쉽게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이 곳 필리핀이 하루아침에 번쩍번쩍한 대국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코로나 때문에 경제 타격을 가장 심하게 입은 동남아 국가라는 뉴스도 봤다.

느리고, 답답하고, 불합리한 것이 아직 많은 나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코에 땀 송골송골 맺혀가며 수박씨 심던 '낙관적인' 린이 국민인 이 나라는 언젠가는 희망의 나라가 될 것임은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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