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나는 하이패스를 사용하지 않는다.
출퇴근할 때 매일같이 톨게이트를 이용하지만 하이패스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이패스는 빠르고 편리합니다"
매번 톨게이트를 지날 때 듣는 말이다.
빠르고 편리하다라... 그렇게 빠르고 편리해서 뭐 하지?
나는 하이패스로 빠르고 편리하게 톨게이트를 나오는 대신 잠시 멈춰 계산대에서 계산원이랑 눈인사 나누는 걸 좋아한다. 톨게이트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돌아가며 교대로 근무하고, 사람이 자주 바뀌는 거 같았다. 오랫동안 자주 보면 친해져서 인사나 안부를 주고받기도 한다.
가끔 그들의 피곤한 표정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처음 하이패스가 들어왔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어? 다들 하이패스를 쓰면 저 자리 없어지는 거 아냐'
쓸데없는 걱정일 수도 있지만, 그냥 계산원들 일자리가 걱정되었다. 톨게이트 계산원이 꿀보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꿀보직이 아닐 것 같았다. 일단 좁은 곳에 혼자 오랜 시간 앉아 있어야 하고,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톨게이트 계산원이 계속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빠르고 편리한 하이패스 대신 느리고 불편한 톨게이트 계산대를 이용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마트도 무인계산대는 이용하지 않는 편이다.
하이패스는 2007년 도입되어 15.6% 이용률을 보였고 , 2년 전인 23년 하이패스 이용률은 90.6%다
하이패스가 도입되고 지난 18년 동안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톨게이트에서 계산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는지 계산해 보겠다.
나는 하루에 두 번 톨게이트를 이용하고 1년에 200일 톨게이트를 이용하고, 하이패스가 도입된 지 18년이 되었다.
10초 ×2회 ×200일 ×18년을 계산해 보면 총 72,000초가 나온다.
72,000초는 2시간에 해당된다. 나는 18년 동안 하이패스를 이용하지 않아 2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아니지. 할인도 해줬으니까 경제적인 손해도 있었다.
하지만 계산원들과 눈 마주치고 웃는 낭만을 18년 동안 누린 대가가 2시간이라면 나는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최근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유인계산대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일자리가 없어져버린 건가?
나도 이제 슬슬 하이패스를 써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오늘 무인계산대에서 예기치 않게 꾸물거렸는데,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산되었어요. 가시면 됩니다"
아, 여전히 근무하고 있었구나! 기쁘다.
사람은 기계보다 느리고 불편하고 게다가 불안정하다.
비논리적이고, 화내거나 싸우기도 하다.
느리고 불편하고 불안정성을 선택할 때는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
나는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느리고 불편하고, 불안정함을 선택하는 걸 낭만이라고 생각하는데, 낭만은 가치가 있다. 인생이 여유롭게 느껴지고 살만한 세상이라고 느껴진다.
빠르고 편리한 건 좋은 거다. 하지만 빠르고 편리함에 가치가 있듯이 느리고 불편한 것에도 보이지 않는 가치가 숨어있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주변의 숨겨진 가치들을 찾아내어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낭만을 추구하는 데는 주의사항이 있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부터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