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자 교복에 입을 레깅스가 배달되어 있는데 현관 앞에 그대로 떨어져 있고 거실엔 불도 켜지지 않았다. 둘째 딸과 아들은 자고 있었다. 조용히 찬밥에 무장아찌 하나를 올려서 굶주린 배를 채우고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가을무로 담근 동치미
남편이 있는 방문을 열어볼까 싶어 방문 앞에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 잠깐 졸았나 싶을 때 벽을 툭툭 치는 소리가 들린다. 술에 말아진 남편의 신호일 것이다. 하긴 아무리 바빠도 생존 확인을 위해 문을 열어보고 출. 퇴근을 했는데 오늘은 문마저 열어보지도 않았다. 못 들은 척 누워있는데 이제는 발로 쿵쾅거리는 소리를 낸다.
‘이 인간이 또 옷에 오줌이라도 싼 거야?’
밀려오는 짜증을 집어삼키며 방문을 열었다. 노트북에선 영화 ‘양들의 침묵’의 한 장면이 정지화면으로 잡혀 있었다. 노트북 옆에는 검은색 하드커버의 자본론이 두 권이나 쌓여 있다. 노트북에 연결된 스피커를 통해 멜 라니 사프카의 Melanie Safka -The Saddest Thing (가장 슬픈 일)이 흐르고 있었다.
And the saddest thing
-Melanie Safka
Under the sun above,
Is to say goodbye
To the ones you love.
하늘 아래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이에요
나는 그녀의 그 우울한 음색이 듣기 싫어 스피커의 전원을 눌렀다. 노트북을 올려놓은 좌탁 아래로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왜?”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등 뒤로 말아 덮은 이불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이불을 들추니 남편의 왼쪽 손목에서 피가 흘렀다. 옆을 보니 무딘 과일칼이 보였다.
“아이고! 인간아. 이제 하다 하다못해 별짓을 다 한다. 죽으려면 면도칼이나 커터 칼로 그어야 죽지. 그 사과도 잘 안 잘리는 칼로 지랄을 떠냐? 도대체 내가 전생에 얼마나 큰 빚을 졌기에 이렇게나 시달려야 하니? 차라리 죽어. 죽으려고 했으면 죽으면 되지. 왜 불러! 지금 밤 열 시이고 내가 아침에 출근할 시간이 7시야. 죽으려면 나 출근하자마자 바로 손목 긋고 나서 가만 자빠져 있으면 이미 죽어서 송장만 치르면 되는데 내내 기다리다가 이제 쓰러질 지경인 몸으로 들어오니까 손목 긋고난리냐? 도대체 어디가 바닥인데? 어? 죽고 싶다는 거니? 살고 싶다는 거니? 도대체 얼마나 더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한 거냐고?”
무딘 과일칼에 피가 엉겨 붙은 것으로 보아 시간은 꽤 지난 것 같았다. 손목을 잡고 상처를 살펴보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 남편의 몸에 손도 대고 싶지가 않았다. 남편이 내가 안아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내가 울면서 슬퍼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이었다. 이제는 남편에 대한 어떠한 연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불에 묻은 피의 양이 상당했다. 119에 전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119 상황실입니다.”
“네. 수고 많으세요. 여기 가령로 590번지예요. 네. 변전소 맞은편."
"그 알코올 중독자 있는 집 맞죠?”
“기억하시군요. 남편이 손목에 자해를 했어요.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은 아닌 것 같지만 출혈이 심해요.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아요. 도와주세요.”
당황하진 않았지만 분노인지 서글픔인지 모를 이유로 목소리는 달달 떨렸다. 다행히 오늘 근무자가 남편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가 야자 끝나고 곧 학교에서 올 시간이에요. 소방관님 저희 집 아시죠? 사이렌 소리 울리지 말고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집 밖에 핸드폰 들고나가 있을게요.”
“연강병원으로 갈 건가요?”
“아뇨. 일단 제대병원 응급실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제대병원으로 갈 거면 경찰엔 연락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다행히 수현이와 용하는 자고 있었다.
나는 성현이에게 문자를 했다.
“성현아. 아빠가 또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119 불렀어. 버스 타고 오고 일단 문단속 잘하고 자. 아마 오늘 병원에서 자야 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