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궤변의 달인

나는 알코올 중독자의 아내였다

by 스칼렛

나는 의자에 앉아 핸드폰의 전화번호를 검색하다 남편의 대학 동기에게 문자를 보냈다.

“남편이 손목을 그었어요. 생명에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고 살짝 그었다는데 봉합하는데 두 시간이 걸린대요. 아마 오늘 밤 병원에서 보내야 할 것 같아요.”

그날 밤이 새도록 그에게선 어떠한 답장도 오지 않았다. 새벽 6시가 되자 동이 트는지 창밖이 훤해지기 시작했다.


두통으로 약을 한 알 얻어먹고 싶었지만 이 넓은 병원에서 내 두통을 잠재울 약 한 알 얻기는 힘들었다.

날이 밝으면 닭이 해야 할 일 이 있듯이 나도 아침이 오니까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일단 고3 생인 성현이를 깨우는 일이 급선무였다. 평상시 같으면 전화벨이 울려도 받지 않았을 터였지만 성현이는 두 번째 전화벨에서 전화를 받았다.

“네. 일어났어요.”

현이는 어젯밤의 상황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동생들 깨워서 학교 보내고.”

“알아서 할게요.”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려고 했지만 그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전화는 끊겼다.


나는 이정원 실장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아직 잠결이었는지 이정원 실장은 잠에서 덜 깬 목소리였다.

“아이고 선생님.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방법을 모르겠네요. 뭐 도울 일 있으면 말씀하시고요.”

이정원 실장이 병원으로 와서 자동차 열쇠를 받아갔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가게 문 연곳도 없어서 먹을 것도 사지 못했다며 만 원짜리 몇 장을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고는 자동차 열쇠를 받아서 내려갔다. 남편이 알코올 환자로 지낸 지 7년째. 하긴 결혼해서도 술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셨으니 그때부터 치면 몇 년일까? 기분이 좋으면 기분이 좋아서 마시고 나쁘면 나빠서 마셨다. 박찬호가 14승을 했다고 한잔, 박세리가 골프에서 우승했다고 한잔, 월드컵에서 이겨서 한잔, IMF라고 한잔, 비가 와서 한잔, 추워서 한잔…….


그가 술을 마셔야 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고 그렇게 한잔 한잔에 남편의 해야 할 일도 술잔에 빠졌고 해야만 하는 일도 술잔에서 나오지 못했다. 어느덧 그가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일이라고는 술을 사러 슈퍼에 가는 일과 화장실 가는 일 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남편이 컴퓨터 매장을 운영할 때 음주운전으로 인해 면허가 정지되었던 때가 있었다. 당시 나는 아이 키우고 살림만 하는 가정주부로 있었던 때라 면허가 없었다. 남편은 무면허로 음주운전을 했고 경찰 검문에서 걸려서 경찰 조사를 받게 되었고 무면허로 인한 음주운전으로 엄청난 벌금이 날아와서야 나는 남편을 데리고 알코올 전문병원을 방문하였다.


정신과 의사들은 일부러 그러는지 원래 그러는지 내 눈엔 그 사람들도 정신병자처럼 보이는 듯 한 행동과 질문을 했다.


여러 의사를 거쳐서 내가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시점에 만난 정신과 의사가 닥터 신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한두 살 어려 보였고 그녀 또한 다른 병을 앓고 있는 듯 지나치게 마른 체형이었다. 당시 나는 정신과 의사들이 모두 환자로 보였다. 다만 그녀는 다른 의사들처럼 퀭한 눈빛이 아니라 뭔가 의지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술 마시고 하는 일이 온갖 책 읽기로 세월을 보낸 남편의 궤변을 이길 의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닥터 신은 남편이 얘길 할 때 A4용지에 남편이 하는 말을 다 적어나갔다. 그리고 남편이 하는 얘길 하나하나 귀 기울여 듣기 시작하자 남편의 궤변은 닥터 신에게 통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난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닥터 신을 신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