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원 기록에 필요한 서류를 거의 작성했을 때쯤 그녀가 내게 보낸 암묵적인 사인은 내 남편은 이런 가계도에서 알코올 중독이 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알코올 중독은 그래서가 아니라 그전부터였어요.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고요.”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똥오줌을 못 가리던 알코올 중독자들도 열흘 정도 병원 치료를 마치면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온다. 이럴 때가 가장 힘든 시기라고 했다. 정신병원에서 생활하지만 이들은 몸에서 알코올만 제거되면 일반인인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환자들은 이 병동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협박과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것은 물론 앞으로 나가서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다짐의 다짐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남편이 술에 깨서 요청한 것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일단 술이 깨서는 밖으로 나가려고 안달하려는 환자들만 보다가 남편의 요청을 받아들인 간호사들 사이에서는 얼핏 외경스러운 느낌마저 감도는 것 같았다.
거기서 남편이 하는 일은 술 마시고 들어오면서 폭력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에게는 경찰 조서를 대신 꾸며 주기도 하고 이혼을 앞둔 환자에게는 법률 자문 등 나름 병원 내에서 그들만의 영웅으로 되어갔다. 마치 교도소에서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왕초 노릇을 하듯 남편은 연강병원에서 그렇게 자리를 잡아갔다.
다른 사람들이랑 일체의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엉뚱한 일로 간호사들을 귀찮게 하는 일도 없었다. 간호사가 주는 약 성분을 파악하여 먹고 싶지 않은 약은 가운데 손가락으로 누른 채 입에 털어 넣는 시늉을 하였다. 나중에 눈치챈 간호사 앞에서는 입에 털어놓고 꼴깍 삼키는 척을 하면서 혀 밑에 약을 숨긴 후 뒤돌아서 버리는 방법으로 약을 먹지도 않았다. 그는 거기서 그렇게 적응을 해나가는 듯 보였다.
한 달 생활비 외에도 병원생활에 드는 비용은 소소하게 쌓여갔고 기약도 없이 그것을 담당해 나간다는 것은 나로서는 마땅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겨울을 나고 감나무 잎이 돋아날 때쯤이었다.
모처럼 주말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의사의 호출이었다.
주말에 의사가 보호자인 나를 찾는 일은 없었다. 간혹 간호사에게서 필요한 것들을 주문하는 전화가 오긴 했지만 주말에 의사가 나를 찾는 것이 불안하였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가는 동안 궁금해서 간호사에게 물었지만 간호사는 자기들도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되려 내게 확인했다.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닥터 신은 나와서 햇살을 쬐고 있었다. 좁은 주차공간에 여러 번 핸들을 돌려 주차를 하는 동안에도 닥터 신은 등 뒤로 내리쬐는 봄볕을 쬐며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다급한 내 물음에 닥터 신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오늘 휴무예요. 보호자님 뵌 지도 오래됐고 의논하고 싶은 얘기도 있어서요. 제가 차를 한잔 사고 싶은데 나가서 차 한 잔 할까요?”
의외의 제안에 어리둥절하는 나의 대답도 듣기 전에 먼저 발걸음을 떼고 병원을 나서는 닥터 신의 모습이 보였다. 병원 뒤로는 좁은 오솔길이 펼쳐져 있었고 닥터 신은 이 언덕을 넘으면 아담한 찻집이 있다고 말했다. 묵묵히 닥터 신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면서도 불안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