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봄 흙이 무너지듯

나는 알코올 중독자의 아내였다

by 스칼렛

닥터 신을 따라 200미터쯤 언덕을 걸어 올라가니 빨간 열매를 맺은 먼 나무가 서있는 아담한 찻집이 나타났다. 이런데 찻집을 차린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여기에 찻집을 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기자기 예쁜 다기가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나도 다기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때가 있었다. 가을의 해 질 녘 햇살이 가득한 거실에 앉아 고구마를 삶아서 대광주리에 담고 다기에 차를 우리 던 평화로운 한때가 내 인생에도 있었던 때가 있었다. 하긴 아직 시린 바람에도 봄빛이 완연한 이런 날 평화로운 마음으로 차를 찾았던 때가 언제인가 싶었다.


닥터 신은 나에게 유리창 밖이 내다보이는 자리를 양보했다.

“보호자님. 다음 달에 아프리카로 의료봉사 떠나요. 우리 인연도 오래됐죠? 벌써 6년째인가요? 남편이 병원 생활하신 지? 보호자님이 처음에 병원에 내원했을 때 모습이 늘 제 맘 속에 남아 있어요. 입원한 환자는 멀쩡한데 보호자님 눈빛에 온갖 두려움과 절망 슬픔이 베여 있었거든요. 반면 너무나 당당하고 담담한 표정의 환자에게서 충격을 먹었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사실 저는 조위제 환자에게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참 독특했어요. 그가 술을 깨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저는 이 환자는 알코올이 문제가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환자는 알코올 환자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알코올 환자가 아니에요. 알코올 환자를 가장한 우울증이 더 깊어 보였어요. 우리 정신과에서는 그래서 가계도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부인이 얼마나 환자에게 헌신적이었는지는 제가 잘 알아요. 그런데 보호자님 헌신이 오히려 독이 될 때 있답니다.

저는 보호자님의 눈빛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묘한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제가 의사 생활 16년 만에 이렇게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것은 보호자님이 처음이거든요. 워낙 특이한 경우이기도 하고 또 이 나라를 떠난다는 어떤 해방감이 작동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엄밀히 따지면 떠나기 전에 제가 보호자님의 슬픈 눈빛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아니할 수만 있다면 보호자님을 해방시켜 주고 싶었답니다.


환자를 놓아 보세요. 환자는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술이 깨면 맨 정신인데 맨 정신으로 돌아오면 엄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는 거죠. 그렇다고 부인처럼 용기를 내서 살만한 의지도 없어요. 워낙에 결이 고운 사람이라 다른 알코올 중독자들에게서 보이는 폭력성도 없죠. 그러면 보호자님은 또 환자에게 희망을 걸죠. 술을 끊고 남편의 역할을 해주기를……. 그런데 제가 봤을 때 그건 불가능해요. 의사라는 직업을 떠나 친구처럼 말한다면 환자에게는 그럴 의지도 가능성도 없어요.

울음을 참으면 볼이 찢어질 듯 아팠다.

나는 계속 볼을 꼬집어서 마사지를 했다.


닥터 신은 갑 티슈를 가져다가 내 옆에 놓아주었다.

"요즘 병원에 재밌는 일이 생겼어요. 특이하게도 경계성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성이 조위제 환자를 흠모하는 여성이 나타난 거예요. 그녀도 나름 배울 만큼 배운 여성이에요. 결혼해서 계속되는 유산으로 남편이 바람을 피웠고 시댁의 재력으로 상당한 위자료를 받고 이혼했지만 우울증이 생긴 거죠. 따지고 보면 둘이 바람이 난 것 같아요.”

나는 닥터 신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 둘이 바람이 나는 게 병원의 윤리규정을 벗어나서 쫓겨나야 하나요?”

“하여간 내가 보호자님 눈빛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요. 그 눈빛 뒤에 뭐가 숨어져있나 싶었는데 그런 엉뚱함이 있었어요.”

닥터 신은 나의 엉뚱한 질문에 어이가 없다는 듯 빤히 나를 바라보더니 나중엔 깔깔대고 웃었다.


나는 담담히 얘길 이어갔다.

“아. 병원에서 쫓겨나진 않는군요. 그럼 됐어요.”

“내가 한 말 다 들은 거예요.”

“아, 어떤 여자가 남편 좋다고 한다고요?”

“네에. 제가 한 말 못 들은 줄 알았어요.

“글쌔 남편이 바람이 났다는 얘긴 거죠? 선생님은 제가 그런 말을 듣고 질투의 감정을 보여야 정상이라고 생각하시겠죠. 어찌 보면 저도 정상이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는 남편이 그 여자랑 서로 사랑이라도 하길 바라요. 선생님 결혼 생활 20년 해보세요. 그에게 애정보다는 우정이 남는 것 같아요. 남편으로 보면 그를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미워요. 그렇지만 한 인간으로 보면 얼마나 안됐어요?

그렇다고 아내로서 제가 더 어떤 점을 노력할 수 있을까요? 어차피 그와 저는 아내와 남편으로 배역이 정해져 있는데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을 누군가 사랑해 준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그도 그 여자를 사랑하길 바라요. 그게 잠깐이라도.”

닥터 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고였다.

“하여간. 보호자님은 강적이야. 아휴! 못살아.”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나갔다.

“알코올 환자랑 산다는 거요. 그건 고난 이상의 그 무엇이 함께 해요. 선생님 제가 제 인생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아세요? 마치 수도승처럼 빼꼭하게 할 일을 만들어요. 그 빼곡한 일들이 저를 지탱하게 해요. 두 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멈추면 어떻게 되나요? 고꾸라지겠죠? 고꾸라지지 않기 위해선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야 해요. 저는 그렇게 끊임없이 페달을 밟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야 남편 병원비도 대고 세 아이 학비를 감당하면서 최소한의 생계를 꾸려갈 수 있기 때문이에요. 남편의 바람? 제 현실적인 문제에 비하면 너무나 감사한 일이죠.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쌀가마니를 내려놓은 느낌이에요.”


닥터 신의 자신의 목에 걸린 스카프를 벗어 내 목에 감아주었다.

“보호자님. 너무 애쓰지 마세요. 보호자님이 책임질 사람이 환자 분만은 아니잖아요? 건강한 세 명의 아이와 보호자님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도 보호자님이 해야 할 의무랍니다. 너무 환자에게만 매몰되지 마세요.”

닥터 신은 말없이 내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후 20여분 정도 남편이 아닌 내 얘길 좀 나눴던 것 같기도 하고 덕터 신의 얘길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걸쭉한 대추차에 세 개의 잣이 뿌려져 꽃잎을 이뤘고 나는 대추차의 찻잔이 맘에 든다고 했다.


닥터 신을 먼저 병원에 들여보내고 차를 움직여보려 했지만 도저히 운전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핸들을 잡고 있는 양팔이 달달 떨렸다. 차에서 내려걸었다. 그냥 하염없이 걷고 싶었다. 봄 흙은 질어서 운동화 앞부분으로 물이 스며들어왔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내게 지나가는 차가 버스정류장까지 태워다 주겠노라며 멈추었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하며 괜찮다고 말했다. 벚꽃은 바람에 휘날리고 햇살은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 아! 날씨는 이렇게 흐트러지게 좋은 날 나는 지금 어이도 걷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