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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칼렛 Nov 13. 2021

10. 이어도로 간 고동지

이어도 설화 동화 _여돗할망 이야기


눈 부신 햇살이 깊은 바닷속까지 파고들었어요. 며칠인지 모를 날들이 지나가고 고동지가 눈을 떴을 땐 선녀처럼 어여쁜 여인이 앉아 고동지를 보살피고 있었어요. 

고동지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방안에는 비단으로 만든 휘장이 드리워졌고, 그 휘장에는 다급한 상황에서 갓을 벗어 던지고 머리에 썼던 버선이 걸려 있었어요.

“여기가 어디요?”

“여기는 이어도라고 합니다.”

“여기가 여인들만 산다는 그 이어도란 말이요? 그러면 나는 아직 탐라 땅을 벗어나지 않았구려.”

“예. 여기는 탐라 땅 이어도입니다. 낭군께서는 용케 저 버선을 머리에 쓰고 있어서 용왕님께서 목숨을 구해주셨나 봅니다.”

고동지는 아내 강심을 떠올리며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어요.

“내 아내는 해상상인의 딸로 일찍이 중국을 오간 뱃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소. 제주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 절반쯤에 있는 이어도 바다는 물길이 험하여 열에 아홉은 수중고혼이 되는 곳이라는 것은 탐라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그런데 버선을 머리에 쓰면 고기떼의 습격을 받지 않아 얼굴을 보전한 채 용왕님께 갈 수 있어 용왕님이 목숨을 구해준다는 말은 아내에게 처음 들었소.”

“참으로 현명한 부인이십니다.”

“그런데 댁은 누구시오?”

“저는 별님이라고 합니다.”

별님은 고동지의 어깨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어요.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운 옷을 입은 별님이 움직일 때마다 비단 치마가 바닥에 끌리며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냈어요.    

선녀처럼 고운 별님은 태풍에 휩쓸려 몹시 허약해진 고동지를 날마다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어요. 별님은 잘 달인 약을 황금빛 그릇에 따라 고동지에게 주었어요.

“이 약을 드시고 나면 씻은 듯이 병이 낫고 몸이 가벼워질 거예요.”

고동지가 약을 들이켜고 나자 별님은 산삼 세 뿌리를 먹였어요. 약과 산삼 뿌리를 먹고 난 고동지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기운을 차릴 수 있었어요.

별님을 따라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보니 고래 등 같은 기와지붕이 길게 뻗어 있었어요. 지붕 아래에는 황금빛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어요. 마당에는 목련꽃이 화사하게 피었고 댓돌 아래에는 작약이 붉게 피어 있었어요. 별님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에 고동지는 하루가 다르게 몸을 추슬러나갔어요.

고동지는 지붕 위로 올라가 담장 너머를 내다보았어요. 황금빛 들녘에는 노랗게 익은 벼가 출렁였어요. 

“바깥세상이 보고 싶구려.”

“안됩니다. 이곳은 여인들만 사는 곳입니다. 금남의 구역이지요. 서방님을 제가 모시고 있는 것이 알려지면 저는 이어도의 율법에 따라 추방될 것입니다.”

“아, 그렇군요?”

고동지의 어깨가 축 늘어졌어요.

“밤이 되면 바깥세상을 구경시켜드리지요.”

“며칠을 누워만 지냈더니 답답하기 그지없구려.”

그날 밤 고동지는 별님을 따라 대문을 열고 밤 나들이를 나갔어요. 밤인데도 달빛에 온갖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선 것이 보였어요.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개천에는 바닷고기들이 손만 넣으면 잡을 수 있을 만큼 가득 차 있었어요. 마치 개울가에서 가재 잡듯 전복과 물고기들을 쉽게 잡을 수 있었어요. 

고동지는 흐르는 물에서 손바닥만 한 전복을 들어 올렸어요. 집으로 돌아와 전복을 살펴보니 앵두 알만한 진주가 두 개나 들어 있었어요.

“아니 어찌 이리 큰 전복을 이리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단 말이요. 마치 탐라 땅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덩이처럼 흔한 것이 전복이고 물고기가 아니오! 믿기지 않소. 게다가 쌍 진주를 품은 전복이라니. 이게 꿈이요. 생시요.”

고동지는 자신의 볼을 꼬집으며 흥분에 찬 소리로 말했어요.

“서방님 이곳 이어도에 사는 여인들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아요. 그러니 들판의 벼도 그대로이고, 바닷속의 물고기도 그대로이고, 나무에 열린 열매도 늘 그대로랍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당신들은 인간이 아닌 게요?”

“이곳 이어도의 여인들은 모두 용왕님의 딸로 따뜻한 물이 나오는 연못에서 날마다 목욕을 하고 나무에 핀 꽃들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일과의 전부랍니다. 그렇게 하면 그 향기가 여인의 몸에 스며들어 여인들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답니다. 이곳에서는 남자가 없으니 시기와 질투도 없고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으니 싸울 일도 없지요.”

고동지는 눈 앞에 펼쳐진 무릉도원을 보고 감탄했어요. 누렇게 익은 벼를 추수해서 고향의 아버님 밥상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만삭의 아내를 집에 두고 온 고동지는 해산한 아내가 미역국이라도 제대로 먹었는지 걱정이 되었어요. 

“고향에 있는 아내가 해산했는지 걱정이 되오. 고향에서는 해산하면 미역에 메밀 조베기를 넣은 미역국을 먹어요. 쌀밥에 전복을 듬뿍 넣은 미역국 한 그릇을 아내에게 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소.”

고동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어요.

“낭군께서는 그저 아내 생각뿐이시군요.”

별님은 토라진 마음이 되어 조용히 자리를 떠났어요.     

다음 날 아침 별님의 집에 달님이 찾아왔어요.

“별님아! 별님아!”

별님은 얼른 고동지를 벽장 속에 숨기고 시치미를 뚝 떼며 반갑게 달님을 맞이하였어요.

“어서 오세요. 달님.”

“어찌 이리 보기가 힘드니. 그나저나 큰일이 났지 뭐니.”

“왜요. 달님.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이어도에는 꽃과 나무가 만발하고 철이 바뀌어도 온갖 먹을 것이 그대로인데 요즘 들어 나무의 열매가 없어지고 물속의 물고기가 사라지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향기로운 꽃향기 대신 음식 냄새가 진동한다고 하여 그 진원지를 찾아 와보니 이 집에서 음식 냄새가 나지 뭐니.”

고동지는 벽장 안에서 마음을 졸이며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어요. 

시치미를 떼던 별님도 더는 숨기지 못하고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자초지종 달님에게 털어놓았어요. 달님은 깜짝 놀라 소리쳤어요.

“아이고, 망측해라. 별님아. 이곳에서는 여인들 외엔 그 누구도 살 수 없다는 것을 몰라? 이어도의 율법에 따라 쫓겨나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니?”

“달님, 무슨 방도를 생각해 낼 테니 저에게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별님아 내가 입 다문다고 이게 감춰질 일이니? 큰일이로구나.”

“꽃은 피었다가 지고 열매는 꽃핀 자리에서 늘 열리는데 그깟 열매 좀 따먹은 게 무슨 큰일이랍니까?”

“어머나. 별님아. 네가 어찌 겁도 없이 그리도 대범해진 거니?”

“물고기도 잡아먹지 않으니 그 수가 날마다 늘어서 물이 넘칠 지경이 아니었나요? 아무런 문제 될 게 없어요. 그러니 우선 달님만 눈감아 주세요.”

달님은 별님의 대범함에 짐짓 놀라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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