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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칼렛 Jan 01. 2022

21. 우선멈춤, pause

나는 알코올 중독자의 아내였다

2022년 계획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나는 "아무것도 안 해보는 것이 계획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너무 열심히 달려왔다. 네팔의 셀파들처럼 영혼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간엔 사느라 바빠서 쉴 여력이 없었다. 이제 내게도 쉬었다 갈 시간이 필요하다.


지난해에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서귀포사무소에서 제주지원으로 왔고 제주지원에서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로 사무분장이 떨어졌다. 성과를 내려면 크게 내고 또 못 내면 자투리 일이 되는 그런 업무를 맡았다.

전통시장 홍보, LMO, 카드 뉴스 제작, 한눈에 보기 쉬운 원산지 표시 제작 등등의 일이었다.

내가 전통시장 평가에서 열심히 해보려 하자 7급 계장님이 불렀다.

"선생님 공무원은 너무 열심히 일해도 안돼요. 팀워크가 중요해요."

6급 팀장님이랑 출장 갔다가 그 얘길 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최 선생님이 열심히 해서 상을 받으면 지원장님과 과장님은 성과를 잘 받으니 두 분이 좋아하시겠죠. 또 최 선생님은 S등급을 받으시겠죠. 그리고 적당히 해서 상을 안 받으면 팀워크가 좋아지겠죠. 선택은 최 선생님이 하시는 겁니다."

7급 계장님의 말도 6급 팀장님의 말도 내게는 피를 솟구치게 하는 말이었다.


이 나이에 공무원에 적응하기가 쉬울 거라고 생각은 안 했다.

그렇지만 뭐든 기대 이상이었다.

뭘 못해도 안되고 잘하면 더 안 되는 게 공무원 사회였다.

나는 시스템 적응이 느렸다. 나름 어얼리 아답터족이었지만 모든 업무를 시스템에 입력해야 하는데 한 사람이 운전하고 가는 동안 한 사람은 시스템에 입력을 해야 했다. 나는 운전도 그들처럼 낯선 길을 빠르게 운전할 수 없었고 흔들리는 차 안에서 안경을 머리 위로 추켜올려가며 더듬거리며 입력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악성민원에 시달린 나에게 과장님은 위로는커녕 되려 "비상식을 견디지 못하면 공무원 하면 안 됩니다."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진짜 이 말은 지금 생각해도 유감이다. 상식적인 사람들과도 이해관계 때문에 의견 조율이 안될 때가 있는데 비상식을 견디라니 이게 과연 상사로서 할 수 있는 말인가 싶다.

나는 8급이었기에 8급에 맞는 수준의 업무를 잘해야 하지만 정작 나는 6급들도 어려워하는 일에서 성과를 냈지만 8급 수준에서 재빨리 해내야 하는 일에서 더듬거렸다.

전통시장 MOU 평가 대비 과정을 인트라넷에 올렸다. 본원은 물론 각 지원의 과장님들 팀장님들의 열광적인 댓글이 올라왔다. 하지만 정작 응원을 받아야 하는 팀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같은 8,9급들도 조용했다.  아니 오히려 더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냥 내 천성대로 열심히 했고 결국 전국 1위를 달성했다. 1위를 한 서문시장에는 500만 원의 상금이 전달되고 담당자는 해외연수의 특전이 주어지는 영예로운 일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또 한 번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한다. 나는 팀워크를 버리고 성과를 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성과를 내야 버틸 수 있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보니 모든 일에 지나치게 열심히 살았다. 특히 경쟁구도에 있는 공무원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존재 이유만으로도 상대에게 심한 불편을 주는 일이었다. 내가 그들이 못하는 홍보 업무를 잘했다면 나는 그들이 지금까지 비상식적인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훈련이 안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딸만한 사람들이 나를 경쟁자로 여기고 경계하는 것이었다.  나는 새로운 단호한 결단을 내렸고 내 단호한 결단에 그들은 놀란 표정이었다. 나중엔 그러한 결단을 할 수 있는 용기가 부럽다고 했다. 회사일은 회사일대로 긴박하게 흘러가던 중에 내가 쓴 동화책 발간도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었다.


이 책을 내는데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사장님은 거의 매주 나에게 이 책을 몇 권이나 팔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무명작가인 너에게 책을 내주는데 재고로 남으면 안 된다는 압박이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노력하면 동화책이고 특수성이 있어서 만권은 팔 수 있지 않겠냐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사무처장님이 만권 팔면 자살하겠노라고 했단다.

천권 팔기도 까마득한 일인데 만권을 어떻게 파느냐며.

그래서 나는 또 독기를 품었다.

기어코 만권을 팔아서 자살시켜버리겠노라고 나쁜 맘을 먹고 말았다.

나는 그날 이후 북 마케팅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한 달 앞서 책을 낸 배희 작가와 스터디를 하고 의견을 교환했다.

인터넷에 책이 올라가자마자 주문이 올라갔다.

나는 너무 신나서 연구회에 갔는데 다들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이리 판매를 서두르느냐는 투였다.

이 분위기는 뭐지 싶었고 상황을 알 수 없는 가운데 나는 계속 카톡으로 알라딘에 올라온 내 책의 링크를 날려 보냈다.

그런데 아무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 책을 만드느라 수십 번의 이메일을 주고받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던 연구실장님마저

당혹스러워하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점에 출간한 동화책이라서 그런지 대량주문이 이어졌다.

그런데 정작 책이 없었다.

작가인 나조차도 인터넷에서 책을 주문해야 하는 판이었다.

브런치 작가 정맘님에게 책 소개를 부탁하고 친절한 허락까지 받았지만 정작 보낼 책이 없었다.

알고 보니 책을 판매할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사장님, 사무처장, 연구실장님, 작가인 나 모두 동상이몽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서로에 대한 섭섭함과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들을 가진채 일은 더 어렵게 얽히고설켜 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정작 책을 주문해도 배송이 늦어지고 있다는 연락에 마음을 졸였고

연구실장은 기껏 고생해서 좋은 책을 냈는데 기뻐하지 못하는 상황에 당황스러워했고

사무처장님은 책을 낸 것도 어딘데 인세에 욕심내서 책 팔아 보겠다고 욕심을 부린다고 오해를 하고

이사장님은 책을 팔라고 그렇게 닦달하던 때는 언제고 이제는 작가로서 품위를 지키라며

꿀 장사하듯 책장사로 나섰냐며 면박을 주었다.


나는 우선 멈춤을 해보기로 했다.

모든 상황에서 멈춤.

그리고 나 자신을 뒤돌아 보았다.

어떤 상황에서 가장 해결이 쉬운 방법은 그 키가 내게 있을 때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회가 원하는 것이 뭔지를 먼저 파악하기로 했다.

그것을 들어줘야 해결이 될 것이기에.

연구회에서 원하는 것은 2쇄를 2,000부 찍기로 하고 인세에서 내게 양해를 구했다.

나는 무조건 o.k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인세가 아니라 빨리 2쇄를 찍어서 주문량을 소화해내는 것이었으므로.


두 가지 사안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는 너무 열심히 살았다. 무슨 목표가 주어지면 그걸 꼭 해내고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기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다. 그러나 나의 최선이 상황에 따라선 상대에게 위협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나에게 잘못했다는 누명까진 씌우지 않기로 했다.

그저 좀 쉬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2022년에는 pause, 우선 멈춤의 해로 정하기로 했다.

2022년에는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기로 했다.

그냥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지면 집에 들어와

달이 뜨면 잠자리에 드는 해로 정했다.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 문을 열고

솔숲의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고

퇴근해서는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석양을 바라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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