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나를 보살피는 시간
나는 알코올 중독자의 아내였다
지난주 업무 중에 구독자 한 분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내 브런치 북을 읽고 용기를 내서 전화를 했다는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하고 균형감 있었다. 그러나 무척 외로운 목소리였다. 남편의 알코올 중독으로 자식들과 소원해지고 자식들이 아버지를 보지 않으려 하는데서 느끼는 서운함을 토로했다.
업무 중 받은 전화라서 길게 통화는 하지 못했지만 오죽해야 물어물어 내게 전화를 했을까 싶었다. 그때는 빨리 전화를 끊어야만 하는 상황이라 충분히 얘길 들어줄 수 없었다. 가까이 있다면 차라도 한잔 하련만 멀리 있는 분이었다.
알코올 중독자의 아내로 살아내는 과정에서 중독자에게 느끼는 절망감의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것은 가족으로부터 느끼는 소외감과 가까운 지인에게 받는 사소하지만 깊고 편향된 오해이다. 그런 오해에 대응할 심적, 시간적 여유마저 없이 오해 속에 그냥 지내다 보니 나는 때론 매우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되어 있기도 했다.
알코올 중독자의 가족 자조모임인 알아넌에서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나는 무척이나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훈련을 받았다고 슬프지 않고 괴롭지 않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래도 성장기 아이들을 키우며 나를 지켜냈다.
알아넌에서는 중독자의 얘기보다는 일주일간 내담자의 성장 이야기를 나누라고 한다.
나는 훈련을 통해 알코올 중독자의 아내이기 전에 나의 모습으로 잠깐씩 외출을 했다.
나는 예쁜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으려고 애썼다.
가끔 밥그릇에 물을 마시는 사람이 있는데 난 밥그릇에 담긴 물을 마시지 않는다.
물은 물컵에, 커피는 커피잔에, 과일은 접시에 담아 먹는다.
그 정도가 내가 나를 대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돈을 들이지 않고 그나마 나를 대접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정도뿐이었다.
지금은 커피숍에 가서도
밥집에 가서도
통장 잔고를 걱정하지 않고
계산을 할 형편이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세신사에게 때를 밀고
계절에 한 번은 인터넷 쇼핑으로 옷을 산다.
염색은 집에서 하지만 꽤 비싼 헤어숍에서 커트를 한다.
그리고 매해 생일엔 큰딸이랑 여행을 한다.
궁 투어, 김동률 콘서트, 라마다 르네상스 옆 일본식 온천이 있는 어느 호텔의 호캉스는 성현이가 베푼 효도 여행이었다.
작년 봄엔 둘이서 경주 여행을 갔다.
벚꽃이 만발한 불국사, 별빛이 빛나는 첨성대, 달빛 밝은 월성 나들이도 좋았다.
특히 여돗할망 이야기에 나오는 그림 중 목간과 고동지가 이어도 여인에게 대접받은 놋그릇은 경주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그림작가님에게 보내 그렸다.
알아넌에서는 자신을 먼저 돌보기를 훈련시킨다.
비행기 탑승 시 비상상황에 자신을 먼저 구조하라고 안내하는 것처럼 말이다.
알코올 중독자의 아내로 자기 자신을 대접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란 무척 어려운 과업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아주 사소한 의식이라도 실천해봐야 한다.
운동을 하건, 건강검진을 미루지 않고 받건, 라디오를 듣건
하다 못해 기름때 묻은 싱크대를 닦거나
따뜻한 보리차 한잔의 온기를 느끼며 지는 해를 바라보는 시간도 나를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시도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알코올 중독자 때문에라는 핑계로
해야 할 일들을 하나둘씩 미루는 가운데
나를 돌보는 일조차 소홀히 하다가는
나 자신마저 시궁창에 빠져 허우적 대는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어떤 것이든 나를 돌보는 의식을 실천해보길 권유하고 싶다. 그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말이다.
내가 나를 대접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나를 대접해주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