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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나무 Sep 13. 2023

할머니의 밥상

반나무, 청산도에 할머니가 있었나?

다음에는 애인을 데리고 오라던 할머니의 말을 여전히 기억하지만 기약이 없네요. 할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담배와 라면이 제일 잘 팔리는 구멍가게를 하고 계시려나요?


섬을 한 바퀴 걸어서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찾은 청산도.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청산별곡의 첫 문장이 저절로 떠오르는 그곳은 이름처럼 산과 바다, 하늘 모두가 푸르를 것 같아 마음이 절로 둥실둥실거렸습니다.


도청항에 배가 닿고 각자 정해둔 길로 하나, 둘 떠났습니다. 저도 일단 나있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니 살랑거리는 치맛자락 같은 붉은빛 꽃양귀비가 가득히 피어난 영화 <서편제> 촬영지에 제일 먼저 발길이 닿았습니다. 따라오라는 듯이 쭉쭉 나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트레킹 제2코스 끝까지 와있었고 하늘이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 말하고 있었습니다.


청산도는 이름처럼 정말 푸르렀습니다.


계속 걸을 힘이 남아 있었지만 근방에서 식당과 숙소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일단 출발지였던 도청항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일찌감치 펜션에 짐을 푼 사람들은 바베큐 준비에 한창이었습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도청항 입구 모텔까지 거슬러 왔는데 이런, 사장님께서 남은 방이 한 개도 없다 하셨습니다.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가족을 찾아오거나 놀러 온 사람들이 많아 아마 다른 곳도 사정이 다르지 않을 거라더군요. 아주 난감했던지라 돌리던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 남는 방이 없겠냐며 모텔 겸 슈퍼 주인장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저씨는 두툼한 전화번호부를 탁하고 펼치시더니 어딘가 전화를 거셨고, 통화를 마친 후 따라오라는 손짓과 함께 앞장서 걸으셨습니다.


주인 걸음걸음을 쫓아다니는 강아지 마냥 아저씨 뒤를 쫄래쫄래 따라 도착한 곳이 바로 할머니네였죠. 이름도 없이 ‘슈퍼’라는 빨간 글씨만 적힌 작고 낡은 간판만이 덩그러니 달려있던 작은 가게. 여행객이 많이 찾는 시기에는 개인집에서도 이렇게 손님을 받곤 하는지 할머니는 아주 자연스럽게 저를 맞아주셨습니다.


여느 시골집처럼 TV조선이 아주 큰 볼륨으로 틀어져 있고, 천장에는 흑백부터 컬러까지 사진이 빼곡히 걸린 방에서 우린 이틀간 같이 눕고 일어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따금 물건을 사러 온 동네분들은 “손녀가 왔나 봐요?”하고 물었죠. 마침 할머니의 진짜 손녀는 저와 동갑이었더랬죠. 부엌일을 도와드리고, 아주 잠깐씩 가게를 보고, 사이사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한 방에 누워 잠드니 정말 손녀가 된 듯했습니다.


객식구 있다고 특별히 반찬 하지 않는다 하셨으면서도 이웃에게 “전복 몇 개만 가져온나”하시고, 거북손을 한가득 삶아주셨습니다. <삼시세끼>에서만 보던 거북손을 직접 먹는 날이 올 줄이야…! 감출 수 없는 신남이 새어 나왔고, 그 모습에 할머니도 덩달아 신이 나셔하셨죠. 오고 가는 손님을 맞이하는 저녁 사이사이, 부엌과 슈퍼 사이에 걸터앉아 할머니에게 배운 대로 거북손 까기에 매진하였고, 다음 날 아침 밥상에는 제가 깐 거북손이 가득 들어있는 된장국이 올라왔습니다.


할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상. 덕분에 처음으로 거북손을 맛보았습니다.


떠나는 날까지 할머니는 저의 끼니를 걱정하셨죠. 섬은 어딜 가나 2인이 기본상이라 혼자서 식당 가면 밥 얻어먹기 힘들다면서 말이죠. 그러니 다음에 꼭 애인을 데꼬 오라는 말도 덧붙이셨습니다. 평소라면 혼자가 좋다 답했을 테지만 이날만큼은 순순히 “네”라고 답했습니다. 바다 내음 폴폴 나는 할머니 밥상처럼 먼 길 왔다가는 제가 걱정되어하는 따듯한 말이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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