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나무 Sep 18. 2023

이곳까지 와주어 고맙다는 말

낯선 이를 반기는 사람들

봉화에 다녀왔다고 하면 다들 “봉하마을, 그 봉하?”하고 물었죠. 안동, 영주와 벗하고 있는 생소한 그곳으로 여행을 가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코로나 때문이었습니다. 지구를 강타한 바이러스로 계획했던 모든 해외여행을 취소하고 집과 일터만 왔다 갔다 하며 몸을 사리기를 몇 달째. 갑갑함을 이기지 못하고 국내 어디라도 다녀오자 싶어 네이버 지도를 켜 저장해 둔 숙소 리스트를 중심으로 이리저리 마우스를 옮겼습니다. 때가 때인 만큼 사람이 적은 곳이면 좋지 않을까, 원래라면 세부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있었을 테지만 한국의 산도 좋지 하며 갈만한 곳을 추리다 결정한 곳이 바로 경상북도 봉화였습니다.



오랜만에 여행을 간다는 설렘도 잠시, 마치 가만있지 못하고 왜 돌아다니냐며 우주의 심판을 받는 것 같은 일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안전하고 편하게 다니기 위해 예약했던 렌터카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대여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심지어 배차 가능한 다른 차도 없다는 전화가 시작이었습니다. 갑작스럽고도 일방적인 취소에 화가 났지만, 코로나 이후 지지부진한 환불과정에 여러모로 지쳐있던 때라 그냥 알겠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다른 렌터카 회사를 알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된 거 끝이 없을 것만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찬찬히 여행하는 것도 좋지 싶어 봉화터미널로 향하는 버스표를 끊었습니다.


다만 동서울에서 출발한 그 버스가 시간이 지나도 시원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죠. 날씨가 갑작스레 여름으로 접어들어 기온이 23도를 웃돌았고, 길 위는 연휴를 맞아 어디론가 떠나는 차로 꽉 막혀 있었습니다. 잰잰걸음으로 겨우 도착한 용인휴게소에서 이유도 모른 채 한 시간가량 멈춰 서 있었는데, 기다림 끝에 떨어진 공지는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것입니다. 두둥. 의사에게 큰 병을 진단받은 듯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습니다. 수술을 할 것인지 아님 일단 치료로 버텨 볼 것인지 결정해야 하듯 새롭게 배차받은 버스를 기다릴지 아님 무더위를 참고 그냥 갈 것인지 둘 중 하나의 결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다만 길이 막혀 에어컨이 멀쩡한 버스가 용인까지 오려면 최소 2시간이라는 말을 듣고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그냥 출발해요”를 외쳤습니다. 덥다는 탄성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고, 손을 비롯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동원하여 바람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더위와 싸우는 운명공동체가 되었고, 더 이상 푸르른 밖의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4시간 30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한 우린 탈출을 위해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습니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 밟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안도감과 함께 그냥 집에 가만히 있을 걸 하는 후회가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이렇게 여행하기 힘든 세상이라니…!


마음이 담긴 딸기는 참으로 달았습니다.


봉화에 도착하기까지는 뜨거움의 연속이었지만, 낯선 여행객을 환대하는 얼굴들 덕분에 다행히 기억은 적정온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햇살 같은 환한 얼굴의 친절이라기보다는 신경 쓰지 않는 듯하면서 툭하고 친절이 튀어나오는 곳이었죠. 간식을 사러 간 만두가게에서는 멀리서 왔다며 만두를 덤으로 얹어 주셨고,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전 목을 축이기 위해 들어간 카페에서는 말씨에서 서울 사람인 것이 티가 난다며, 벌써 돌아가는 거냐고 본인이 더 아쉬워하며 예쁘게 꼭지를 딴 딸기 한 그릇을 대접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내와 떨어진 식당에서 밥을 먹고 택시를 부탁드렸더니 때마침 시내 가는 동네사람이 있다며 뒷자리를 내어주셨고, 짐은 락커룸이 없는 터미널 대신 근처 가게에서 흔쾌히 맡아주셨습니다.


방문을 열어 놓으면 마음을 차분케 하는 풍경이 걸어 들어왔습니다.


무엇보다 정갈했던 집과 똑 닮은 숙소 주인장 부부는 지치지 않고 저를 살펴주셨습니다.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다, 오늘 하루 여행하느라 수고했다며 맛있게 익은 봉화 사과를 손수 깎아주셨고, 손목이 아파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아침밥상 소식에 아쉬워하는 얼굴이 눈에 밟혀 결국 아침 먹고 가라며 푸짐함 밥상을 차려주셨죠. 차가 없어 어떡하냐며, 체크아웃 후의 일정을 물으시더니 결국 주인아저씨는 차를 끌고 나오셨고 갑자기 현지인 투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것도 공짜로요. 운인지 불운인지 모르게 때마침 목적지가 보수공사로 문이 닫혀있었거든요.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며 풍경이 멋진 절이 있다고 차에 타라 하셨죠. 그렇게 예정에 없던, 아니 이름도 모르던 축서사도 가고, 이몽룡 생가에도 갔습니다. 집 앞에는 하얗게 탐스러운 사과꽃이 피어나있고, 처마에는 제비집이 달린 말 그대로의 옛집에는 여전히 누군가 살고 계셨고, 봉화 토박이 주인아저씨 덕분에 <춘향전> 이몽룡의 모티브가 된 성몽룡이 살았던 집 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축서사는 추천해주신 말 그대로 경치가 좋았습니다.


단지 3일 머물렀을 뿐인데,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나 많은 베풂을 받는 다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일까요? 찾아온 이들을 따스하게 맞이하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힘들었던 도착 과정은 어쩌면 이후의 친절을 더 달콤하게 느끼기 위한 연출 장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이전 05화 할머니의 밥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