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다정함이 있다면
“이번이 서울역인가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뚫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어폰을 빼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니 어디 멀리 가시는지 일상적으로 들고 다닌다 하기에는 조금은 큰 가방 하나를 들고 계신 50대 후반의 여성이 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서울역은 다음이라 답한 후, 아주머니께서 내리시는 걸 확인 후 다시 음악을 들으며, ‘이번주는 버스 안이군’ 했습니다.
한 달에 두세 번, 많으면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일이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대뜸 질문을 받는 것은 여전히 긴장됩니다. 특히나 멀리서부터 천천히 창문을 내리며 저를 향해 다가오는 차를 발견할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국가시험이 있는 날 시험장 주변을 지나가면 그날은 같은 답을 20번 이상 해야 하기도 하죠. 주로는 길을 물어보지만 이따금 지금이 몇 시인지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번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으시던 할머니께서 손짓하며 저를 부르시길래 폴짝폴짝 달려갔더니 추워서 그런데 자신의 옷을 여며 줄 수 있겠냐 물으셨습니다. 잔잔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5개의 단추를 정성스레 끼워드렸습니다.
신기한 것은 해외여행 중에도 질문을 부르는 저의 운은 휴가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딱 봐도 외국인인 제게 버스정류장이 어디인지, 자신이 찾는 카페가 어딘지 묻는 사람을 만날 때면 이건 아무래도 타고난 운명인가 보다 싶습니다.
길 위에서 질문을 받았던 수많은 날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말레이시아에서 주차기계 사용에 관해 도움을 청하는 케냐인 아저씨를 만났던 날입니다. 정오의 쨍쨍한 햇볕을 피해 마사지를 받고 개운한 마음으로 문 밖을 나서자마자 들이닥친 질문. 주차티켓을 끊어본 적도 없는 제가 알려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차기계를 향해 걸어가 쓰여있는 글자를 하나씩 읽어보았지만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아저씨 옆에서 함께 난감한 표정으로 서있다, 잠시 기다려보라 말하고는 마사지숍에 들어가 직원에게 도움을 청해보았습니다. 별 소득은 없었지만요.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 말하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어찌 되었든 도와줘 고맙다며 음료수를 사겠다며 저의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음료수를 얻어 마실 만큼 무언가 한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숙소에 가서 딱히 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디로 갈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레 마사지샵 바로 옆 가게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길가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유리도 천막도 쳐지지 않은 개방된 작은 식당에서 각자 주문한 음료수를 한 잔씩 들이켰습니다. 톡톡 쏘는 오렌지 맛 환타 한 병이 잠깐이지만 태양의 기운을 걷어가고,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아저씨는 말레이시아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저는 케냐는 아니지만 옆옆이라고 할 수 있는 잠비아에서 일 년간 보냈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예상보다 꽤 오랜 시간을 보냈지요. 낯선 조합이 신기했는지 옆 테이블에 앉은 두 명의 사람이 우리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 그들 모두와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숙소로 돌아왔던 게 기억나네요. 이 날은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가장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눈 날이었습니다.
종종 ‘이어폰을 끼지 않고 걷는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 나일까?’ 싶어 집니다. 외국에서 길 물음을 당하면 ‘나 너무 현지인화 되었나?’ 싶어 웃기기도 하고요. 하지만 굳이 타고난 운명을 거스를 필요는 없다 싶습니다. 여기서의 운명이란 길을 잘 알려주게 생겼다는 것이죠. 하하. 작지만 누군가를 도왔다는 뿌듯한 마음도 얻을 수 있으니까 꽤 좋은 일이지 않은가요. 언젠가 누군가가 당신의 장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때는 주저 없이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길을 잘 알려주게 생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