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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나무 Dec 23. 2023

미리 겁먹지 않았다면

닿지 못하더라도 보내고 싶은 변명

이따금 그대들은 무엇을 하고자 했던 것일까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대들이 제게 준 장미는 이미 시들어 사라진 지 오래지만 말이죠. 커다란 러시아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는 저의 첫 유럽 여행지였습니다. 유럽여행을 검색하면 드넓은 자연경관과 시간이 축적된 건축물이 얼마나 멋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많지만 소매치기, 물건 강매와 같은 경험담도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심지어 가방을 들어주는 친절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돈을 요구했다는 경험담도 친구들의 입을 통해 심심치 않게 들었지요. 맞아요, 저는 지금 왜 옹색하게 “No”라고 계속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변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투오차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이 풍경이 종종 그립습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되었을 정도로 중세시대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의 올드타운은 매일 걸어도 질리지 않았습니다. 잘 정리된 돌길과 눈길을 끄는 붉은색 지붕, 알록달록한 건물을 배경으로 늘 사람이 북적이던 중심 광장, 중세시대 의상을 입고 서빙을 하던 식당 직원들. 아름답고 신기한 풍경이 많은 곳이지만 그중에서 한 곳을 꼽는다면 조용히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코투오차 전망대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아침 7시의 전망대는 조용하다 못해 바람에 날리는 낙엽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죠. 전망대 돌담에 앉아 빨간 지붕과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텀블러에 담아 온 따듯한 허브티를 홀짝거리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비루 게이트를 지날 때면 꼭 꽃을 구경했습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이었는데, 어디선가 그대들이 나타났지요. 이른 아침 관광지에서 장미를 건네는 남자 2명. 수상하게 보인다는 건 본인들도 인정하시겠죠? 그때 스쳐 지나간 생각은 이런 것들 뿐이었습니다. ‘꽃을 파는 사람들인가? 장미 한 송이 선물해 주는 척하면서 꽃 값을 엄청 비싸게 요구하는 사기단이면 어쩌지?’. 눈 뜨고 코 베일 수 없다는 방어적 태세로 단호하게 “괜찮다, 필요 없다”라 답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건네는 손길에 어제 꽃 한 다발을 이미 사서 괜찮다 했더니 뒤에서 장미를 한 아름 들고 있던 당신이 거기에 장미 한 송이를 더하면 되지 않겠냐고, 왜 안 되냐 질문했죠. 그러게 말입니다. 비루 게이트(Viru Gate) 앞에서 꽃을 사 화병에 꽂아 둔 것은 사실이었고, 거기에 한 송이를 더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저는 그저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여러 번의 권함과 거절이 오고 간 끝에 그대들은 제 검정 가방 위에 붉은 장미를 던지고는 왔던 길로 돌아섰고, 저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한 채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예기치 못하게 장미 한 송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9시가 넘자 한 명, 두 명… 전망대를 찾는 사람이 늘어 가방에 장미를 꽂고 돌담에서 일어나 아래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산책하는 사람, 낚시하는 사람, 강아지와 노는 사람. 각자의 방식으로 공원을 즐기는 모습을 구경하며 찬찬히 걷는데 저 앞에 장미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걷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제가 받은 것과 비슷한 포장되지 않은 장미가 눈앞을 스쳐갔습니다. 그대들은 이른 아침 저를 비롯해 많은 이들에게 장미를 배달했더군요. 저는 괜스레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대들은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저 장미 한 송이를 받아 주길 바랐을 뿐인데 말이죠. 걱정도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전해 듣기는 했을까 하고. 미리 겁먹지 않았다면 당신들이 누구인지,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인지 물을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한동안 장미는 물컵에 꽂혀 화장실을 화사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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