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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나무 Oct 23. 2023

어쩌다 우리가 만나

인연이 주렁주렁

호주 시드니의 한 레스토랑 안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 남성과 스테이크를 먹었습니다. 스트리트 이름도, 가게 이름도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천장이 높고, 어두운 톤의 길쭉한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던 호주 사람들의 키만큼이나 시원스럽게 쭉 뻗어있던 공간이었던 것만큼은 또렷합니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는 사람으로 가득했던 곳. 저는 막 시드니에 도착한 여행자였고, 당신은 워킹홀리 중이었죠.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하소연할 곳이 필요한 저 때문이었는데, 숙소와 소통에 오류가 있어 도착하자마자 큰 난관에 맞닥뜨렸고 오페라하우스를 배경으로 매년 열리는 새해맞이 불꽃축제로 시드니는 어딜 가나 사람으로 북적여 새로운 숙소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당신은 숙소문제가 곧 해결되길 바란다며, 너무 걱정하지 말고 맛있는 거 먹자며 저를 다독여주었습니다.


시드니에서 처음 본 이에게 점심을 얻어 먹었습니다.


처음 본 이에게 위로를 건넨, 그 이후로 다시 보지 못한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은 안동에서 만나 하루를 함께 보낸 여행자의 동생이었죠. 우연히 알게 되어 동행인이 된 우리는 안동역 건너편 허름한 모텔방에서 침대를 놔두고 방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함께 밤을 지새우고 헤어졌습니다. 시드니에 도착하자마자 문제에 봉착한 저는 그녀로부터 당신이 시드니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번뜩 생각해 냈습니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홀로 여행을 왔다는 이야기부터 가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농밀한 이야기를 처음 본 이에게 하던 누나만큼이나 서슴없던 당신은 저를 흔쾌히 만나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찌하다 만나게 되었을까요? 그 이야기를 하자면 또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성인도 가능하지만 그때는 대학생의 특권이라 여겨졌던 ‘내일로’. 일주일간 이어진 내일로 기차여행의 마지막 여행지는 안동이었습니다. 마지막 날이니 욕심부리지 않고 오랜만에 하회마을 한 바퀴를 돌고 당일 저녁 서울행 기차를 탈 계획이었습니다. 초등학생 이후 처음 방문한 김에 부용대에 올라볼까 싶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습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건너편 풍경을 멍하기 바라보고 있는 제게 나이 많은 한 남성이 다가와 대뜸 “혼자 왔어요?”라고 물었습니다. ‘뭐지?’ 싶은 생각과 동시에 얼떨결에 “네”하고 답이 흘러나왔습니다. 제 답을 들은 아저씨는 ”그럼, 건너편에 가서 기다려요.”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방문했지만 하회마을은 그대로 였습니다.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어린 시절부터 누누이 들었지만 저는 저의 감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건너편 나무들이 만들어 낸 그림자 위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차 한 대가 쓰윽 오더니 아는 얼굴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뒷자리에는 또 다른 젊은 여성이 타고 있었습니다. ‘나만큼이나 대책 없는 사람이 또 있네’라고 생각하며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저씨는 마을을 관리하는 분으로 혼자 여행 온 젊은이들을 자주 도와주고 계셨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뒷자리에 앉아 마을 한 바퀴를 돌아보고,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할머니께도 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여기까지 왔는데 하회마을만 보고 가기 너무 아깝다며, 첫 차를 타면 아침 8시 즈음 청량리에 떨어지니 서원도 구경하고 저녁도 먹고 좀 쉬다 내일 가라 제안하셨습니다. 혼자였다면 그 제안이 아무리 매력적이라도 수락하기 힘들었겠지만 다행히 동행인 언니가 있어 흔쾌히 응했습니다. 멋진 풍경이 보이면 함께 사진도 찍으면서 찬찬히 서원 산책을 한 후 한우마을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는 그날 처음으로 안동이 한우가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겠다던 딸이 오지 않고 내일 가겠다는 메시지만 달랑 보내니 걱정이 되어 득달같이 전화한 엄마는 자초지종을 듣더니 더욱 근심이 가득해졌지만, 딸은 해맑게 괜찮다며 내일 보자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한우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나오니 주변의 불빛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좀 쉬라며 아저씨는 안동역 건너편 모텔에 우릴 내려주시더니 비용까지 본인이 내시고는 조심히 돌아가라며 작별인사를 건네셨습니다. 그렇게 언니와 모텔 바닥에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저는 첫 차를 타러 안동역으로 건너왔습니다.


새벽 첫 차를 타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만남이 이어지고 그들에게 도움을 받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인사를 건네서, 어쩌다 보니 그 시간 그 길 위에 서 있어서, 식당 옆 테이블에 앉아서, 버스 옆 자리여서, 같은 숙소여서, 일정이 비슷해서… 여행 중에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되는 루트는 참으로 다양하지만 그 어느 것도 미리 예상할 수도, 계획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만남을 향한 한 조각의 열린 마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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