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지만 늘 마음만은 가까운 E에게
여행을 하는 사람은 모두 좋은 사람일 거라고 믿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순진했던가요. 여행을 다니다 보면 좋은 순간, 좋은 사람만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홀로 여행하는 작은 키의 동양인 여성은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지요. 캣콜링은 다반사요, 남자친구 있냐, 결혼은 했냐는 질문으로 시작해 적나라하게 성관계를 요구하는 멘트를 듣는 일도 적잖이 있습니다.
가장 좋았던 여행지가 어디냐는 질문에는 한 곳을 꼽기가 어렵지만, 최악의 기억이 있는 여행지는 바로 답할 수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그곳에서 저는 여행을 통해 만났다는 3명의 친구가 함께 운영하는 작은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습니다. 침대와 화장대가 겨우 들어가 있는 작은 방, 연평균 32도를 웃도는 나라에서 달달거리는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더위를 식혀야 하는 곳이었지만 여행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고 마음이 맞아 게스트하우스까지 차렸다는 이야기가 매력적이었습니다. 물론 저렴한 가격도 한몫을 했고요.
하지만 그곳은 최악의 기억을 심어준 숙소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니 1층 공용공간에서 1명의 주인장과 2명의 게스트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빨리 씻고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턱끝까지 차 있었지만, 잠깐만이라도 함께 놀자는 이들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해 소파에 기대어 타이거맥주 한 병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서로의 이름과 어디서 왔는지를 묻고, 오늘 뭐 했는지를 나누는 일상적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맥주가 줄어들고, 배경처럼 흐르던 음악은 점점 볼륨이 커져갔고, 무르익은 분위기에 사람들은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시끄러운 분위기를 즐기지 않기에 이제 방으로 올라가야겠다 싶어 일어섰는데 누군가가 저를 벽으로 밀치더니 몸을 바싹 붙여왔습니다. 그 이후 일어난 일은 길게 서술하고 싶지 않네요.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했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온몸에 힘을 주어 그를 밀쳐낸 후 계단을 후다닥 올라 방에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잠시 후 누군가가 제 방 문을 두드렸고, 저의 심장은 노크 소리보다 빨리 뛰었습니다. 누가 방 문 앞에 서있는 것인지 알 수 없기에 그저 소리가 멈추기를, 발걸음이 저 멀리 이동하기를 숨 죽이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리가 사라진 그 공백에는 ‘오늘 밤을 여기서 보내는 게 맞을까? 내일은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에 휩싸인 고민이 들어찼습니다. 그 순간 며칠 전 알게 된 동갑내기 한국인 친구 E의 제안이 떠올랐습니다. 말라카에 침대가 큰 방을 예약해 두었는데 혹시 관심 있으면 같이 가자 했던 말을 말이죠.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큰 흥미가 없었는데, 절실한 선택지가 되었습니다. 늦은 밤 연락해 지금도 그 제안이 유효한지 묻고 다음날 이른 아침 친구와 함께 말라카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말라카는 다양한 문화가 함께 어울려 사는 재미난 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우린 예쁜 벽화 앞에서 사진을 남기고, 저녁이면 라이브바에 가서 음악을 듣고, 작은 수로를 따라 산책했습니다. 덕분에 쿠알라룸푸르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릴 틈이 없었지요.
종종 그때 E가 없었다면, E가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찌저찌 그 시간을 잘 보내고 이겨냈겠지만, 친구가 있었기에 그 시간을 알록달록 채울 수 있었습니다. 서울과 구미라는 거리감을 이겨내지 못해 그 이후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여전히 친구라는 이름 안에서 SNS로 서로의 근황을 살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멀지만 늘 가까운 느낌이 드는 친구. 그를 쿠알라룸푸르에서 만나 참 다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