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해변이 달리기에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따금 난데없이 솟아나는 마음이 있다. 달리기를 해야겠다는 다짐의 시작은, 발리 해변길이 달리기에 좋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데서부터였다. 달리기에 좋다는 말을 '들었다'와 달리고 '싶다' 사이에 무슨 작용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나는 갑자기 달리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달렸던 것은 언제였을까? 신호등이 깜빡거리면 달리기보다는 걸음을 늦추고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 편한 나이기에 일상 속에서 달릴 일이라곤 전혀 없다. 달린다는 행위를 한 것은 아무래도 2018년에 조합원으로 활동하는 협동조합에서 단체로 참가했던 <바다의날 마라톤>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5km 부문에 참여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3분 정도 달리고는 숨이 부족해 그 이후로는 걸었다.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걷기 대회에 참가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마라톤이었기에 그때 받은 완주 메달은 여전히 자랑스레 내 방에 걸려있다.
이토록 달리는 것과 멀었던 내가 발리에 갔다고 갑자기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 테니 일단 초보러너들이 애용한다는 어플 '런데이'를 깔았다. 약 20분간 1분 달리기-2분 걷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첫 발을 떼었다. 고작 1분인데 숨이 어찌나 차던지.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과 점점 더 무거워지는 몸의 무게를 오롯이 느꼈다. 그래도 1분 달리기는 2분으로, 5분으로 점차 성장해 갔다.
달리기를 연습하며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필리핀 세부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달리던 사람들. 땀을 내며 무언가에 열중하던 그들의 진지한 표정. 여행지에서도 자신의 루틴을 지켜 나가는 삶에 대한 동경이 피어오른 순간이었다. 또 매주 일요일마다 달리기를 하는 나와 키가 비슷한, 심지어 이름이 같은 지인의 SNS 피드.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그녀는 진심을 다해, 매주 빠짐없이 달리는 중이다. 꾸준히 하는 것에는 나 또한 일가견이 있지만 운동에서 만큼은 예외다. 짓밟혀 더러워지고, 주변 열기에 금방 흐물흐물 녹아 사라지는 눈처럼 운동하겠다는 매년의 다짐은 온데간데없이 증발해 버리기 일쑤다. 하지만 그것이 두렵다고 시작을 못할 필요는 없으니까. 드문드문이라도 이어나가는데 힘이 있다 믿는 나는 꾸준히 달려 나가는 이들을 선망하며 이 세계에 발을 들였다.
발리에 도착해 제일 처음 달린 길은 꾸따 비치를 따라 잘 깔린 도보 위였다. 듣던 대로 달리기에 좋은 길이었다. 때문에 늘 누군가의 달리기를 볼 수 있었다. 해가 아직 떠오르지 않은 어둠 속에서도, 해가 쨍쨍 내리쬐는 한낮에도, 태양이 바다를 향해 뛰어드는 시간에도. 발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잠시 머무는 여행자들이 한데 섞여 '러너'라는 공통된 이름 안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먼저 달리고 있는 사람들 덕분에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었던 약한 마음을 내려놓고 나만의 호흡으로 달리기를 시작할 수 있었고,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어주고, "Hi"하고 힘차게 인사해 주는 이들 덕분에 '내일도 달리러 나와야지!' 다짐할 수 있었다.
하루, 이틀 뜀을 계속하면서 발리가 달리기에 좋다는 말은 비단 길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바다. 그래 바다가 있다 이곳은. 한국에서는 주로 집 주변을 달렸다. 그러니까 빌라에서 빌라로 이어지며, 주차된 차가 그 사이사이를 메꾸는 풍경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탁 트인 푸르른 빛깔이 나를 맞아주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달리니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보다 달리기가 덜 힘들게 느껴졌다. 이런 바다의 마법이라면 평생 풀리지 않아도 좋을 거다.
근데 나 어렸을 때 계주 선수, 그것도 스퍼트를 내야 하는 마지막 주자였는데 언제부터 달리는 게 힘들어졌을까? 어린 시절 친구들과 골목길에서 뜀빡질을 하던 것을 제외하고는 달리기는 늘 숫자라는 이름의 기록이 따라붙었다. 체력장에서는 100m 달리기를 몇 초 안에 끊느냐가 중요했고, 운동회에서는 우리 팀이 이기는 것이 중요했다. 속도를 내어야만 하는 달리기를 계속해왔던 것이고, 승패가 있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점차 달리기와 멀어지고야 말았던 것이다.
내가 점점 달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동안 세상에는 달리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여전히 기록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매일매일 자신만의 속도로 달리기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점차 눈에 들어왔다. 각자의 루틴을 만들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로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멋져 보였다. 그들 사이에서 꾸역꾸역 30초씩, 1분씩 달리는 시간을 늘려 나갔다. 그리고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달리기를 막 시작했을 때에는 저녁에 달렸지만 지금은 아침에 달린다. 아침에는 골목을 어슬렁 거리는 고양이를 만나기가 쉽고 (그래서 달리기 하다 멈춰서는 일이 많지만), 아침잠이 없는 어르신들의 슬기로운 하루 시작을 만날 수 있다. 오랫동안 늦게 잠드는 삶을 살아왔는데, 달리기를 하면서 나란 인간은 아침시간을 이토록 좋아하는구나 느꼈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나와 주변에 대해 알아갈 기회를 얻는 일이다.
발리 힌두인들은 하루 3번 향을 피우며 기도를 올린다. 특히 그날의 첫 번째 향을 올리기 전, 집 앞을 깨끗하게 쓸어 낸다. 지나간 어제의 시간을 닦아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들의 매일매일을 아침 달리기를 하며 만났다. 달리기로 하루의 자세를 정돈하는 러너들과 마음을 다해 기도를 올리는 발리 사람들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 싶었다. 누군가는 달리기를 통해 감사함을 배웠다던데, 나는 각자의 루틴을 지켜 나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래서 지금도 열심히 달리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지금 한국 날씨는 달리기에는 너무 추우니까. 물론 겨울에도 꾸준히 달리는 이들이 보면 나약한 목소리로 보이겠지만, 지금은 꽃봉오리가 피어오르는 계절이 되면 1분 달리기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다. 드문드문 이어나가는 게 나의 취미생활 기조니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따듯한 여행지로 날아갈 때마다 숙소 근처에 달릴 만한 공원이 있는지를 구글지도로 열심히 찾아본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낯간지럽지만, 색다른 여행 방법을 하나 얻었다. 아마 봄날이 되었다고 자연스럽게 달려지지는 않을 테지만, 아마 시작과 동시에 힘듦이 찾아올 테지만 그때마다 '미소와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답하자(<30일 5분 달리기> 중에서)'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