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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나무 Mar 20. 2024

발리에서 서핑을 해보았습니다.

서핑보드 위에 서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발리 하면 서핑, 서핑하면 발리. 그도 그럴 것이 발리의 바다들은 서핑보드를 시원하게 태울 수 있는 파도를 갖고 있다. 초보가 서핑을 배우기 좋은 꾸따와 짱구부터 능력자들이 시원하게 파도를 가를 수 있는 울루와뚜까지, 각자의 레벨에 맞게 바다를 즐길 수 있다. 그리하여 도착한 날부터 가는 날까지 주구장창 서핑을 즐길 수 있는 서핑캠프가 1주부터 한 달까지 코스로 준비되어 있을 정도다. 꼭 서핑캠프가 아니더라도 서핑을 목적으로 발리를 찾은 이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꾸따 비치는 서핑하는 사람들로 늘 활기가 넘쳤다


초보가 서핑을 배우기 좋다는 꾸따와 짱구 중에서도 모래바닥인 꾸따가 다칠 위험이 적다. 그리하여 꾸따 비치를 걸을 때에는 '서핑?' 하는 질문을 20번 이상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만큼 로드샵이 빼곡히 들어서있다. 서핑에 흥미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발 한 번은 담가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 길을 걷다 편안하게 말을 걸어 준 중개인과 약속을 잡고 숙소로 돌아왔다. 사실은 거기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그 귀여움에 심장까지 떨리던 아깽이 Mary 때문에 그곳을 택했다.


사랑스러운 아기 고양이 Mary


다음 날 아침, 검은색 래시가드로 온몸을 봉쇄하고 선크림을 바른 후, 모자까지 챙겨 쓰고 바다로 향했다. 등짝 훤히 내놓고 놀다 그날 밤 알로에겔을 수없이 바르고, 다닥다닥 감자를 붙여 열기를 빼내고 나서야 잠들 수 있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바다 위에서 패션은 포기토록 한다. 그리하여 파도 위를 나는 펭귄 한 마리가 탄생했다.


내 인생의 첫 서핑 선생님은 쉬는 시간이면 담배로 에너지를 충전하던 50대 아저씨로, 10대 시절부터 파도 위에서 놀던 베테랑이었다. 약속한 수업 시간에 맞춰 비치로 가면 늘 담배를 피우며 파도를 응시하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익숙하게 앉았다. 그는 '파도 읽기' 중이었다. 나에게는 그저 뒤에서 앞으로 밀려오는 파도일 뿐이지만, 그에게는 매 순간의 파도가 다르게 읽히는 듯했다. 수업 전에 오늘은 파도가 이러저러하니 저기서 타자고 한다거나 오늘은 더 멀리 나가야겠다고 한다거나 그날의 상황을 꼼꼼히 브리핑해 주었다. 도란도란 그와 이야기 나누는 것이 좋아 결국 나는 자연스레 내일도, 그다음 날도 서핑을 하러 바다를 찾았다. 무엇보다 그는 칭찬에 박한 사람이었다. 넘어졌을 땐 괜찮다고 어여오라고, 그저 그렇게 탔으면 빨리 오라고, 잘 탔으면 한 손 엄지척, 오 이번에는 정말 잘 탔는데 싶으면 양손 엄지척. 칭찬남발을 좋아하지 않는 내게 딱 어울리는 선생님이었다. 칭찬에는 박하지만 그는 다정한 사람으로, 나중에라도 서핑을 즐기고 싶다면 그날의 파도 정보를 어디서 보면 좋은지 어플도 알려주고, 보드를 여러 번 바꿔가며 내게 적절한 크기를 찾아주기 위해 애썼다.


겨우겨우 파도 위에 서있는 펭귄 한 마리가 되었다


서핑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재미있었고, 마음먹은 것보다는 훨씬 어려웠다. 운동신경이 뛰어나지 않은 몸뚱이로 하루 2-3시간씩, 일주일 만에 잘 탄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어쩜 매일 넘어지기를 1시간 연속한 끝에서야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되는지... 어제는 그래도 막판에 연이어 칭찬받을 정도로 잘 탔으니까 오늘은 첫 판부터 잘 일어날 수 있겠지 기대하며 신호에 맞춰 힘차게 일어섰건만 제대로 일어나 보지도 못하고 짠 물에 몸만 담갔다. 파도가 발 끝에 닿는 순간을 기다려, 천천히 그다음에 빠르게 패들링 하고, 치킨윙, 발 위치를 기억하고, 시선은 정면. 나를 위한 파도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되뇌었지만 역시 머리로 안다고 몸이 아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파도와 같다했던가. 살아오면서 수없이 들었던 그 비유를 보드 위에 서고 나서야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어제도 살았고, 엊그제도 살았지만 결국 오늘은 새로운 시간. 살아간다는 건 이렇듯 늘 새로움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어설플 것을 각오해야 하는가 보다. 그리하여 나는 걸음을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아장아장 파도 위에 발을 디디고, 넘어지고를 반복해야만 했다. 빠지더라도 파도를 타는 법을 배우려면 결국 파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모래사장에 배를 깔고 누워 동작을 연습하는 것으로 첫 발걸음을 떼었지만, 모래 위에서는 결코 파도를 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모든 파도를 탈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저 멀리서부터 제각각의 크기와 방향의 파도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나는 거기서 내가 올라탈 수 있는 파도를 기다리고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는 두려워하지 말고, 머뭇거리지 말고 힘차게 일어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 인생은 정말 파도와 같구나!' 고개가 끄덕여졌다.


종종 선생님이 지금 파도 정말 아름답지 않냐 물었다. 눈을 크게 떠서 보기도 하고, 작은 눈을 더 작게 떠 째려보기도 했지만 내게는 그저 넘실넘실, 굽이굽이 다가오는 비슷한 모양새였다. 결국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한 나는 선생님께 물었다. 대체 무엇이 아름답냐고. 그러자 선생님은 하얀색 이를 드러내 웃으며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파도가 아름다운 것이라 했다. 아무래도 파도의 아름다움을 아는 날이 내게는 오지 않을 것 같다.


과연 파도의 아름다움을 깨우치는 날이 내게도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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