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아니고 롬복 린자니산을 올랐지만
"나, 롬복 린자니산 올라가려고."
"잉? 네팔 가서도 안나푸르나를 안 올라간 언니가, 갑자기?"
그러게 말이다. 갑자기 뭔 바람이 불어 산을, 그것도 한라산의 약 2배에 달하는 3,726m를 오르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인지. 과거의 나를 이해해보려 해도 여전히 역부족이다. 하지만 사람은 때로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고야 마는 이상한 존재다. 히말라야를 만나기 위해 준비하고, 다녀와서 고생한 몸이 쉬어가는 곳이라는 네팔 포카라까지 가서도 산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 또한 이해하지 못할 일 중 하나려나.
산은 아래에서 보는 게 좋다며, 포카라에서 일주일 가까이 놀멍쉬멍 하는 나를 보다 못해 숙소 근처 한인민박집 사장님이 이해할 수 없다며, 시간 낭비 하지 말고 1박 2일이라도 다녀오라고 채근했지만 꿈쩍 치 않았던 것이 바로 나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때 산에 오르지 않았던 것이 후회로 남아있는가? 전혀. 흐음... 사실 산을 오르는 행위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놀 것이라고는 자연풍경 밖에 없는 강화도에서 산을 놀이터 삼아 자라난 아이다. '뒷산은 곧 내 산'이라 생각하며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산딸기와 앵두를 따먹고, 도토리와 밤을 주웠다. 국내 여행을 할 때면 근처에 오름직한 산이 있나 살펴보고 친구들을 꼬셔 오르는 편이다. 매주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해질 정도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계절에 따라 옷을 바꿔 입는 풍경은 늘 좋아했다.
국토의 70%가 산인 한국 못지않게, 인도네시아에도 산이 참 많다. 발리에 있는 아궁산, 바투르산도 유명하지만 어차피 코모도(Komodo)에서 길리(Gilli)로 넘어갈 거니까, 그 김에 린자니를 올라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산 위에서 텐트를 치고 잔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높은 만큼 하늘과 가까울 테고,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풍경을 바라보다 잠드는 하룻밤은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지수가 올랐다. 무엇보다 화장실/샤워 시설이 없다는 것이 좋았다. 누군가에게는 간이텐트 안에서 볼 일을 봐야 하고, 씻을 수 없다는 것이 이 산에 오르기를 포기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 점이 가장 큰 메리트였다. 돌이켜 생각해 안나푸르나를 오르지 않았던 이유는 이러했다. 나는 찬물로 잘 씻지 못하는데, 여행자들에게 따듯한 물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숙소 주변 나무를 베어야 한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고는 찬물로 씻을 수 없다면 오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린자니는 모두가 씻을 수 없다니까, 그게 왠지 안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산을 오르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더러운 얼굴과 손톱 가득 낀 때를 보며 자주 웃었다.
업체를 정하고, 예약금을 보내고 종종 블로그 후기나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았다. 모두가 준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주기적으로 산에 오르는 산악인들의 후기뿐이었다. 이들도 힘들다고 하는 곳을 내가 오를 수 있을까? 후기를 찾아보면 볼수록 의문만 가득 차올랐지만, 취소할 마음은 들지 않았고 결국 출발선에 서고야 말았다. 내가 택한 일정은 2박 3일로, 슴발룬(Sembalun)에서 시작해 세나루(Senaru)로 내려오는 루트였다. 근데 나는 무슨 호기로 1박 2일이 아니라 2박 3일을 택했을까? 한라산도 올라가 본 적 없는 생초짜 주제에. 그리하여 나는 가진 것이 없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신었는지 알 수 없는 트레킹화가 한 켤레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스틱과 헤드랜턴을 업체에서 빌리고, 낮에는 더울 테니 반팔/반바지, 저녁에는 많이 춥다니까 경량패딩을 비롯해 보온을 책임질 옷들, 더러운 얼굴을 종종 씻어낼 패드, 보조배터리 등 필요한 짐을 배낭에 옮겨 담은 후 커다란 캐리어를 숙소에 맡겼다. 짐을 줄인다고 줄였는데 생각보다 배낭이 무거웠다.
함께 산을 걸어 올라갈 멤버들과 인사를 나눈 후, 트럭 뒤에 실려 걱정과 기대감이 뒤섞인 마음으로 바람을 신나게 맞았다. 나는 가이드 아왈과 이탈리아에서 온 커플 그리고 중국인 새라와 한 팀이 되어 걸었다. 인증샷을 찍고 POS1에 도착할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걷는 속도에 확연한 차이가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들 늘상 산을 걷는 사람들이었다. 익히 들었던 것처럼 유럽인들은 우리와 체력이 다른지 스틱 없이도 슥슥 앞으로 나아갔고, 새라의 여행은 늘 산이 출발점이라고 했다. 늘 다이빙 할 바다로 여행지를 정하는 일본인 아저씨를 필리핀 보홀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또 다른 이는 오를 산을 목적으로 여행지를 정한다는 게 재미있었다. 여행하는 방법이 이토록 다양하다니! 그렇다면 나는 어떤 기준으로 여행지를 택해 왔을까? 아니아니, 집중집중! 지금 이곳에 온 목적은 이 산, 그러니까 눈앞에 나있는 길을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 반나무야! 휴우...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일단 인도네시아의 화산이란 종종 걷던 한국의 산과는 완전 다른 환경이었다. 재가 쌓여 조금만 방심하면 미끄러지기 일쑤였고, 바람에 먼지가 날리기라도 하면 눈물이 흘렀다. 쪼리를 신거나 아예 맨발로, 그것도 식량과 텐트를 지고 오르는 포터들을 보면서 튼튼한 신발을 신은 나는 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가 싶었다. 그래도 저 앞에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꾸역꾸역 걸었다. 3시간이 흐르고, 4시간이 흐르고... 올라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내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중도포기를 하고 내려가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같이 오르던 다른 팀 가이드는 자기 팀도 4명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2명밖에 남지 않았다며, 그렇지만 너는 포기하지 말고 힘내라며 응원을 해주었다.
3일간 '포기'라는 단어가 내 몸을 몇 번이나 타고 흘렀을까? 1일째는 그래도 첫날이니까 지금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으로 걷고 또 걸어 캠프사이트에 도착했다. 다양한 색의 텐트들과 그 사이사이를 메우는 다양한 국가의 언어들이 감격스러웠고, 눈앞에는 추위를 이겨내고서도 계속해서 바라보고 싶은 풍경이 놓여 있었다. 이곳에 올라와보지 못했으면 어쨌을까 싶어 감동이 배가 되었다. 2일째는 걷기 시작하니 포기할 구간이 없었고, 3일째는 마지막날이니까 걸어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걸어내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속으로 숫자를 세어야 했다. 20걸음만 걷자, 30걸음만 걷자 하면서.
결론을 말하자면 린자니산을 무사히 올랐다 내려왔지만, 정상은 찍지 못했다. 제일 꼭대기에 올라 3726 숫자가 적힌 판을 들고 사진 찍을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올랐지만, 새벽 2시 반에 시작한 둘째 날 새벽 산행은 걸어도 걸어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해는 이미 떠올랐고, 저 멀리 뾰족한 봉우리가 계속 같은 거리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가이드 아왈은 원한다면 시간이 걸려도 괜찮다 응원해 주었지만, 나로 인해 전체 일정이 늦춰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오늘의 걷기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아침을 먹고 다시 시작이었으므로 체력 안배를 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리하여 서밋까지 1시간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나는 포기를 선언했다. 너덜너덜해진 몸뚱아리로 서밋에 올라간 친구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지금까지 올라온 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랑스러움이 스물스물 차올랐다. '이 만큼 올라온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낯선 도전을 해 보았다는 것에 의미가 있으니까, 이만하면 충분하지 뭐.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까, 멈춰서는 것도 용기인 거야.'
아마 함께 걸은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이 조차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느린 사람의 발걸음에 맞춰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안다. 평지에서 나는 경보를 하냐는 소리를 종종 들을 정도로 걸음 속도가 빠르다. 때문에 나와 다른 속도의 친구와 길을 걸을 때에는 걷다 멈추기를 수없이 반복하거나 속도를 맞추기 위해 온 신경세포를 곤두 세운다. 근데 평지가 아닌 계속해서 이어지는 오르막길에서는 오죽하랴. 그렇지만 친구들은 늘 나를 위해 멈추어 기다려 주었다. 보이지 않는 나를 향해 내 이름을 크게 불러 주었고, 내가 미안한 마음을 가질까 지금쯤 쉬어야 했다며 괜찮다 말해주었다. 쉼터에 도착하면 잘했다고, 대단하다며 응원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 날에는 발바닥에 생긴 물집과 뭉친 다리로 걸을 때마다 발목부터 엉덩이까지 통증을 느껴 가뜩이나 느린 걸음이 더욱 느려졌다. 30걸음, 20걸음이었던 숫자세기는 10걸음으로 줄어들었다. 그런 나를 선두에 두고 모두가 내 속도에 맞춰 걸었다. 이런 민폐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이들이 나를 민폐라 생각지 않아 주는 것이 감사했다. 아마 누구 한 명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었더라면 나는 빠르게 중도포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 덕분에 마지막 지점까지 무사히 걸어 내려왔다.
린자니에 또 오를 계획이 있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그때마다 나는 "한 번이면 충분한 거 같아요"라고 답했다. 서밋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을 법도 하지만, 전혀. 누군가는 높은 산을 정복하는 맛이 좋다는데 아무래도 내게는 없는 영역인 것 같다. 이번 산행으로 높디높은 산보다는 나무가 우거진 잔잔한 둘레길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대신 어디선가 아득한 오르막길을 만나게 되면 린자니를 올랐던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이쯤은 별 거 아니다, 할 수 있다 스스로를 격려하게 될 것이다. 내 안에 비교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는 것은 때때로 큰 힘이 되니까.
blog_ 초보자의 호기로운 린자니산 2박3일 트레킹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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