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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나무 Apr 03. 2024

발리에서 임시캣맘으로 살아보았습니다.

좋은 친구가 되어 준 고마운 존재들에게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는 길에서 고양이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다. 비록 그 고양이는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을지라도 한도초과의 귀여움과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결국 핸드폰을 집어 들고 사진을 찍는 것이 바로 집사라는 존재다. 나를 한 번 봐달라며 '야옹'하고 소리 내는 것에 주저함이 없으며, 혹시라도 가까이 와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손가락 하나를 쭈욱 내밀기도 한다. 그렇게 길에서 고양이를 만나면 갓 구운 빵 냄새가 길거리에 퍼지듯 행복한 기운이 온몸에 스며든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딜 가나 (물론 가 본 지역이 몇 개 없지만) 강아지도, 고양이도 참 많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강아지들 대부분은 주인이 있지만, 고양이는 습성이 그러하듯 길에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배고픔에 굶주려 있었다. 어느 날 저녁식사를 하러 Made's Warung에 가는데, 길 위에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를 만났다. 하얀색과 옅은 갈색이 뒤섞인 얄상한 치즈냥이었다. 그는 아주 자연스레 다가와 엉덩이를 들이밀더니 배가 고프다 했다. 줄 것이 없어 엉덩이를 통통 두드려 준 다음 미안하다 말하고는 길을 건너 식당으로 들어섰다.


이 고양이는 늘 지나가는 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문제는 밥을 먹는 내내 말간 목소리와 표정이 계속 떠올랐다는 것이다. 발걸음을 옮기는 나를 바라보던 그 초롱초롱한 눈빛은 마치 자신을 정말 이대로 두고 갈 거냐 말하는 듯했다. 그리하여 언젠가 아름다운 장면이라 생각해 마음속 고이 접어두었던 다짐을 펼쳐보기로 했다. 지난 필리핀 세부 여행에서도 매일 다양한 생명과 인사를 나눴다. 강아지, 고양이, 닭, 염소, 소...  그중에서도 강아지가 참 많았고, 다들 배가 고파 보였고, 피부병이 심해 안쓰러웠다. 모알보알에서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려고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동네 개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몰려들었다. 그러자 한 여행객이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으로 내리더니 무엇을 꺼내었다. 사료였다. 그녀는 모두가 한 입씩이라도 먹을 수 있도록 적절한 간격을 유지해 사료를 놓아주었다. 머리로만 생각하던 일을 누군가는 진짜로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사료를 주는 게 뭐 어려운 일이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배낭여행자에게는 사소한 지출도 큰 것이며, 이미 무거운 가방에 자리를 만들어 다른 존재를 위한 물건을 담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밥을 먹고 나가 근처 편의점에 가서 고양이 사료를 찾았다. 첫 번째 편의점은 규모가 작아서인지 사료가 없었는데, 두 번째로 간 Indomart에는 있어 건사료와 짜 먹는 간식을 한 팩씩 구입하고 나와 기쁜 마음으로 고양이를 만났던 길가로 돌아갔다. 아까 나를 반겨주었던 치즈냥이가 다시금 다가와 엉덩이를 들이밀었고, 어디선가 노랭이 한 마리와 어두운 색깔의 고양이 두 마리가 나타났다. 각자가 싸우지 않고 저녁식사를 할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료를 부어놓고 기다렸다가, 다 먹으면 또 조금씩 부어주고를 반복하며 한 시간 정도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날 이후로 매일 아침에는 서핑을, 저녁에는 고양이들 밥 주는 것이 꾸따에서의 고정 일정이 되었다. 이따금 지나가면서 고양이들과 함께 있는 나에게 관심을 갖는 외국인 여행자들도 있었다. 사실 사료를 부어줄 때마다 주변 가게 사람들이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다행히 눈치 주는 이는 없었다. 덕분에 고양이들에게 나만의 이름을 붙이며 매일 저녁을 충만하게 보낼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내게 말을 걸어 주었던 친구는 ‘친근이’. 나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마다 말을 걸고는 다가가 궁딩팡팡 해달라, 놀아달라며 도로 위가 제 집인 양 눕기를 좋아했다. 또 다른 노란 고양이에게는 ‘욕심쟁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자기 앞에 있는 사료도 다 안 먹었으면서 다른 고양이의 사료를 자주 탐냈기 때문이다. 가장 몸집이 작고 겁이 많던 아이는 '막내'라 불렀는데, 밥을 먹다가도 사람이 지나가면 흠칫 놀라 저 멀리 도망가기 바빴다. 그리고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고양이에게는 ‘대장’이란 이름을 주었다. 하지만 붙여 준 이름과 달리 겁이 많았다. 매일 저녁 길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정이 많이 들어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날에는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녁마다 4마리의 고양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 이후 지역을 옮길 때마다 숙소 근처에서 고양이를 만났다. 고양이들은 혼자 여행하는 나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고, 나는 할 수 있는 작은 호의를 베풀었다. 그중에서도 고양이집사로 가장 행복했던 곳은 롬복 본섬 옆에 자리한 작은 Gili Trawangan(길리 트라왕안, 이하 길리T)이다. 숙소를 나서자마자 8마리의 고양이와 인사 나눈 것을 시작으로 섬 어디를 걷든지 간에 고양이를 만났다. 담장 위에서, 모래 위에서, 마사지가게에서, 식당에서 그리고 숙소에서. 나의 아담한 방갈로 방을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걸어 들어와 캐리어를 시작으로 킁킁거리며 방 한 바퀴를 순회하던 꼬리가 짤따란 고양이의 이름은 Anjing(안징)이라 했다. ‘안징’은 인도네시아어로 개라는 뜻이라 이상하다 싶어 숙소 스태프에 물어봤더니, 길리T에는 개가 없어서 이 아이를 개라고 부르기로 했단다. 그러고 보니 진짜 이 섬에서는 개를 마주친 적이 없는 것 같다. 안징도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안징”하고 부르면 쪼르르 다가와 배를 발라당 까고 누웠다. 그렇게 안징과 아침식사를 함께 하는 것으로 매일 하루를 시작했다. 며칠 후 우리가 동시에 “안징”하고 외치면 누구한테 갈까 궁금하다며 한 번 해보자 숙소 스태프가 내기를 걸어왔다. 결과는 내가 승!



안징은 늘 이렇게 발라당 눕기를 좋아했다


안징을 비롯해 길리T에서 만난 고양이들은 모두 귀 한쪽이 잘려 있었다. 이는 TNR을 했다는 의미. 그 외에도 길을 걷다 보면 고양이들이 먹을 밥과 물이라고 쓰여 있는 기다란 대나무 밥그릇이 곳곳에 보였다. 고양이를 위해 사료와 물을 채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안심이 되었다. 고양이를 키우는 집도 꽤나 많아 보였다. 초크목줄을 한 고양이를 종종 만났는데, 집냥이와 길냥이가 크게 구분 없이 살아가는 중이었다. 섬을 걸으면 걸을수록 궁금해져 검색을 해보았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섬을 ‘고양이 섬’이라 부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만난 섬 주민에게 이곳은 고양이가 참 많은 것 같다 했더니,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비밀을 꺼내 알려주었다. 이 섬은 아주아주 오래전에 고양이만 살던 섬이라고, 그러니 이 섬의 주인은 고양이들이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 얼굴 위에도 그녀와 닮은 미소가 떠올랐다. 작은 존재들을 인정하는 그들의 삶이 참 멋지다 싶었다.


길리T에 놓인 고양이 급식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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