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납작하게 보지 않기
한낮에 출발한 비행기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덴파사르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심사대로 향하는 긴 줄에서 한국에서부터 외워 온 Terima-kashi(뜨리마까시)를 소리 내지 않은 채 입 안에서 여러 차례 굴려보았다. 드디어 내 차례! 여권을 챙기면서 수줍고 어설프지만 "뜨리마까시"하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니 저쪽에서는 "Sama-sama(사마사마, 천만에요)"하고 화답을 보내왔다. 할 수 있는 말과 알아들을 수 있는 말 하나에 지루하다 못해 견디기 괴로웠던 7시간의 비행이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이제 정말 발리다!
여행을 할 때면 적어도 자기소개, 인사, 감사표현 정도는 익혀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스펠링 하나도, 발음도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순간만큼이라도 그곳에 더 녹아들고 싶기에. 어색한 한 문장이라도 현지어를 내뱉으면 나를 대하는 온도가 달라짐을 왕왕 느낀다. 생각해 보면 나도 그렇다. 더듬거려도 한국어를 내뱉는 외국인을 만나면 더 반갑고, 기특하고, 예뻐 보이니까.
하루에 한 문장씩 익히면 한 달 후에는 30개의 문장을 내뱉을 수 있을 거란 큰 포부를 가지고 Selamat pagi(슬라맛빠기, 좋은아침)를 시작으로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인사말을 하나씩 외우고, 입에 붙을 때까지 내뱉었다. 인도네시아에는 기본인사만 총 4개로, 시간에 따라 다른데 어느 기점으로 인사말이 바뀌는지 알쏭달쏭했다. 또 굿나잇 인사(Selamat malam, 슬라맛말람)를 아직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써도 되는 건지도 궁금해졌다. 그럴 땐 쇼핑몰 또는 식당에 들어가면서 나를 반기는 직원들이 어떤 인사말을 내뱉는지 유심히 살폈다. '아직까지는 selamat siang(슬라맛시앙, 주로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사용)을 사용하는군', '오! 지금은 selamat sore(슬라맛소래, 오후 3시부터 해가 질 때까지)네.' 하며. 인사말을 클리어한 후에는 내 이름을 말하고, 안부를 묻고, 중국어로 말 거는 현지인에게 "Orang Korea(오랑코리아, 한국사람이야)"라고 말해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숫자는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더라.
글자를 막 읽게 된 어린아이처럼 길거리에 있는 표지판을 자주 소리 내어 읽었다. Masuk(=entrance), Buka(=open), Bagus(=good), Tutup(=closed), Selamat datang(=welcome) 등 몇 개 되지 않는 아는 단어를 길가에서 만날 때면 반가워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때때론 지나가는 이에게 나 저 단어 안다고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이따금 친히 문장과 발음을 교정해 주는 현지인을 만나기도 했다. 한 번은 밥 먹으러 간 식당에서 음식값을 인도네시아어로 물었는데, 아주머니가 뭐라고 했냐며 되물으시더니 나의 문장과 발음을 정성 들여 고쳐주셨다. 감사인사를 50번쯤 내뱉고 나니 뚝딱대던 음이 자연스러워졌고, 피부는 발리 태양에 점점 더 갈색으로 익어갔다. 종종 나를 현지인으로 생각하고 인도네시아어로 다다닥 말을 걸어오는 이가 생겼고, 3-4마디 문장을 내뱉고 나니 "오! 너 인도네시아어 할 줄 아는구나!" 하며 반가워하는 이도 생겼다. 그럴 때마다 "Tidak(띠닥, 아니)"이라고 답하고는 간단한 인사말 밖에 모른다 당당히 웃어 보였다. 그러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며 그쪽에서도 미소를 보였다. 유쾌한 웃음은 짧은 만남이지만 한 문장이라도 더 온기를 나눌 수 있게 했다. 덕분에 이번 여행에서도 길 위에서 다정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인도네시아어는 들으면 들을수록 그 음이 참 귀여운 것 같다. Jalan-jalan(잘란잘란, 산책하다/여행하다), Ayo-ayo(아요아요, 갑시다), Hati-hati(하띠하띠, 조심해)처럼 같은 단어를 두 번 반복하는 건 더더욱. 게다가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처음 본 사람과도 친근히 이야기를 나누는 넉넉함을 가졌다. 한 번은 인도네시아 친구와 택시를 탔는데 그가 기사님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고는 순간 둘이 원래 아는 사이였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장면은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어디에서든 인도네시아 사람을 찾아내었고, 어느 지역 사람인지를 묻고는 웃음을 섞어가며 길게 이야기를 나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수다 떨기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아무래도 팩트인 것 같다. 아무튼 이들의 살랑살랑 다정한 모습은 한국인인 내게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해외여행에서 한국인은 한국인을 찰떡 같이 알아보지만 인사를 나누지 않는 종족이다. (물론 예외인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그렇다는 말이다.) 인사를 했는데 받지 않으면 그건 한국인이라는 웃픈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말이다. 자주 찾았던 길리 트라왕안 선착장 옆 카페에서 일하던 친구는 내게 물었다. 한국사람들은 왜 서로 아는 척을 하지 않냐고. 글쎄, 잘 모르겠다. 우리 모두 어렸을 적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 바른 것이라 배웠는데 말이지. 그리하여 한국인과 인도네시아인은 서로를 신기해했다.
우리는 해외 어딘가 놀러 갔는데, 그곳에 한국인이 많으면 순간 그 공간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사실 좋은 곳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은 똑같고, 나도 그중 하나인데 말이지. 그리하여 나는 발리로 떠나오기 전 했던 다짐을 슬며시 다시 꺼내 보았다. 우리 모두 지금 이곳에서 나를 위한 최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여행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마음껏 그리는 콜라주들이 그냥 제멋대로 그려지며 아무에게도 납작하게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각자 그리고 싶은 그림을 시간을 내어 여기에서 붙여 그린 것뿐이라고.'
_ <여행의 장면> | 혹시, 한국 분이세요? 중에서, 임진아
insta_ 반나무 여행사 | 복잡하지 않은, 조용하고도 아름다운 발리 풍경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