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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회고 11

이별하는 중입니다.

by 반나무

행복했던 572일, 장거리의 벽을 넘기지 못하고 이별을 했습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7시간을 날아야지만 만날 수 있던 사람. 멀리 떨어져 있고 서로 다른 상황이었지만 매일 드문드문 연락을 주고받던 우리였기에 잘 가고 있다고 믿었는데 잘 익은 열매가 툭 떨어지듯 이별도 툭, 그렇게 제게 떨어졌습니다.


나보다 먼저 챙기고 싶은 사람을 처음 만났습니다. 늘 내가 1순위였던 제가, 스케줄이 불규칙한 그의 연락을 기다리며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고, 가까이 있지 못한 애틋한 마음을 그의 사진과 영상으로 달랬습니다. 눈을 뜨면 그에게 연락이 왔는지 확인했고, 엄마에게 그의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밤마다 그의 목소리가 담긴 영상이 자장가가 되어주던 나날들. 제 일상이 누군가로 가득 찬 경험은 처음이었고, 신기했고 그래서 더 소중했습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를 알아가는 것은 보물찾기 하듯 재미가 있었습니다. 숨겨진 보물찾기 쪽지를 하나씩 찾을 때마다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기쁨과 뿌듯함이 함께 찾아왔습니다. 늘 밥 먹었는지 확인하고, 물 많이 마시라, 운동하라 잔소리하는 것이 그의 사랑의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잔소리가 달콤하게 들렸습니다. 밥 먹고 있어서, 친구들이랑 같이 있어서 대화하지 못하면서도 종종 영상통화를 거는 것이 지금 자신의 시간을 나와 함께 나누고 싶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말도 못 하면서 전화는 왜 하는 거야' 싶던 짜증이 싹 걷혔습니다.


이제는 멀어지는 거리에서, 몰랐던 그의 마음을 알아가는 중입니다. "사랑하니까 상처 주기 전에 멈춰야겠다."는 그 말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회피형에 대한 여러 글을 읽으며 그의 도망이 어떤 의미인지, 그의 감정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는 중입니다. 늘 책임감에 짓눌려 있는 그가 안쓰러웠는데 결국 그 책임감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도망가는 것이라는 걸,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길 어려워하며 늘 웃음과 농담으로 넘어가는 건 왜 그런 것이었는지, 집에 들어가면 쇼츠 세상으로 달아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말이죠. 늘 기다리는 입장에 놓여 있던 사람은 나이기에 내가 더 많이 참으며, 더 많이 사랑한다 생각했는데 회피형에게는 장거리 연애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그도 나름대로 애쓰고 있었구나 싶어 고맙고, 근데 이렇게 계속 회피하며 깊은 동굴 속으로만 들어가다가 그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그를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스스로를 알아가는 중이기도 합니다. 이 연애를 통해 내가 배운 것이 무엇인지도 곱씹어 보고요. 늘 감정의 큰 변화 없이, 좋으나 싫으나 5점 만점의 3점 정도를 유지하며 살아가던 제가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의 파동을 경험하게 되었죠. 제 안에 이렇게 많은 색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시간이었습니다. 감정이 살아 숨 쉬는 것이 햇살이 강물 위를 스치는 것처럼 이토록 반짝이는 일이라는 것을요.


하지만 이제는 중심을 다시 내게로 옮겨 올 때입니다. 이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그 막막하고 아릿한 마음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으로 저는 저를 다시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이별한다’는 건 어떤 걸까요? 몇 날 며칠을 고민해도 제 안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어 chatGPT에게 물으니 이렇게 답하더라고요. "내가 나를 더 잘 알아차리고, 내가 나를 더 사랑하는 쪽으로 돌아오는 것." 이 이별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가야 할 방향을 알고 나니 마음이 조금 차분해진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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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지금 이별 중이라면, 우리 함께 나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걸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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