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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회고 10

확신과 의심 사이

by 반나무
img1.daumcdn.png 영화 <콘클라베>


콘클라베가 열리기 전 부랴부랴 영화관에 가서 영화 <콘클라베>를 보았습니다. 가까운 이들의 추천사를 듣고 꼭 봐야지 생각했지만 바쁜 일상 중 영화관까지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쉽사리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놓치지 않고 보았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i로 시작해 다양한 알파벳으로 끝나던 크레딧, 긴장감과 몰입도를 한층 더해 준 음악, 배우들의 연기 등 '아, 좋다!' 싶은 순간이 여럿 있었지만 영화를 보고 난지 몇 주가 흐른 지금도 계속해서 생각나는 것은 '확신(certainty)'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커다란 알사탕을 입에 넣고 왼쪽, 오른쪽 번갈아가며 조금씩 굴려 먹듯이 일기를 쓰다 생각해 보고, 일하다 생각해 보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 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굳게 믿음 또는 그런 마음을 담고 있는 '확신'은 발음함과 동시에 뭔가 내 안에서 단단함이 피어나는 느낌입니다. 확신을 가진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확신이 있으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힘이 될 테니까요. 어린 시절에는 무엇이든 명확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게 무엇이 어울리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하지만 30대가 된 지금은 모든 것이 흐릿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확신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고, 있다면 그 기분은 무엇일까 상상해보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돈이 넉넉해서 걱정이 없으면 확신이 더 단단해질까? 결혼을 해서 울타리가 생겼다는 기분이 들면 확신이 더 생길까? 하는 궁금증만 늘어나는 요즘입니다.


발 없는 유령이 된 것 같은 둥둥거림이 가득한 요즘이라 그랬을까요 영화 속 이야기가 잔잔하게 마음을 도닥여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 안에 불안이나 의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지나친 확신을 하기도 하지요. 스스로 생각해도 이 정도면 교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어느 정도의 의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유익하다 싶네요. 의심이 있을 때 신비도 있고, 믿음도 있을 거라는 말처럼요. (사실 영화에서는 '확신만 있고 의심도 없다면, 신비도 없고 믿음도 필요치 않습니다,'라고 말했지만요...)


누구나 자신 안에는 확신과 의심이 뒤섞여 있을 테지요. 너무 확신에 차면 주변의 피드백을 놓치거나 다른 가능성을 간과할 수 있을 테고, 반면 의심이 너무 많으면 주저하게 되고, 결단력이 떨어질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의 삶을 쌓아 확신과 의심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나가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의심 중 다행이라면, 적어도 제 삶이 망하지는 않을거란 확신이 있다는 것. 그거면 일단 충분하다 생각하며 오늘을 힘내어 살아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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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저의 마음을 다독였던 영화 속 설교 입니다.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잠시, 가슴에서 우러나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서 서로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성장하려면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있었습니다.

다양성은 하느님이 교회에 주신 선물이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다양성, 사람과 견해의 다양함은 교회의 능력이 됩니다.

교회를 수년간 섬겨오며 제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다른 어떤 죄악보다 가장 두려운 죄악이 바로 '확신'이라는 것.

확신은 화합의 가장 큰 적입니다.

확신은 인내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그리스도조차 끝내 확신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 위에서 제9시에 그는 절망으로 울부짖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의심과 함께 걸을 때 살아있는 것입니다.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도 없고 믿음도 필요치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의심하는 교황을 허락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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