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하다는 말의 온도
얼마 전 참여했던 ‘Time Left'라는 소셜 다이닝 프로그램에서 누군가의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어쩌다 그런 주제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인·프랑스인·러시아인·오스트리아인이 함께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모두가 Yes or No 혹은 그 중감쯤의 대답을 했는데, 프랑스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응, 충분히 했어.”하고요.
그 한마디가 유난히 따듯하게 들렸습니다. 충분히 했다는 말엔 평가가 없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온기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말은 성취보다는 자기와의 평화에 가까운 태도처럼 느껴졌습니다.
요즘은 인스타그램만 켜도 하루에 수십 번씩 ‘아직 부족하다’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더 예뻐져야 하고, 더 벌어야 하고, 더 가져야 한다고. 이런 흐름 속에서 스스로에게 충분하다고 말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이고, 그래서 아쉬움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아쉬움은 충분함보다 훨씬 쉽게 찾아오지요. 무려 6개월 만의 다이빙 그리고 오랜만에 찾은 발리에 마음이 들떴습니다. 2년 전처럼 이번에도 몰라몰라(개복치)를 만날 수 있길 바라며 누사페니아 앞바다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높아진 수온 탓에 만남은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새로 산 액션캠 방수케이스의 부품이 언제인지도 모르게 사라져, 첫 다이빙 후 바다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속상함에 얼굴이 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카메라 없이 다이빙을 하니 오히려 눈앞에 펼쳐진 산호벽 풍경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카메라가 있으면 무언가를 찍어야 한다는 욕심이 생기기 마련인데, 손에 든 것이 없으니 그저 눈에 그 순간의 색과 빛을 온전히 담을 수밖에요.
또 달라진 몸무게 때문인지 전과 같이 다이빙을 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부력조절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다이브 컴퓨터도 오류가 생겨 결국 친구의 것을 빌려 사용해야 했지요. 마음처럼 흐르지 않는 상황에 아쉬움이 돌덩이처럼 마음에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숙소에 돌아와 하루의 다이빙을 복기하니 금세 괜찮아졌습니다. 아쉬운 상황 덕분에 달라진 몸무게에 맞춘 움직임을 새로이 익혔고, 다이브 컴퓨터 읽는 방법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충분한 다이빙이었습니다.
물론 내일 또 아쉬움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뒤엔 이만큼으로도 괜찮다, 충분하다 스스로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건 멈추자거나 무언가를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쫓기지 않으면서 나의 페이스로 걸어가자는 말이니까요.
10월이 되어 9월을 회고 중에 있습니다.
이번에는 9월에 충분했던 것들을 잘 찾아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나 온 9월에 어떤 온기를 전해주고 싶으신가요?
초록채집가 반나무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기록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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