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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오 Nov 18. 2021

"우리들이 왕비를 죽였다"

경복궁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건천궁이 원된 것은 지난 2007년이다. 우리에게 건천궁은 특별한 공간이다. 망국의 역사를 가진 나라는 대체로 마지막 황제가 거처했던 궁궐을 '역사의 교육장'으로 리모델링한다. 하지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의 겨울궁전이나 중국 장춘의 위황궁 등 마지막 황제의 거처는 교육의 장이기보다 관광객들의 테마 코스로 오히려 더 기억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랜 복원공사를 끝내고 지난 2007년에 일반인에게 모습을 드러낸 경복궁내 건청궁도 고종황제의 독립의지가 투영된 공간이지만 우리에게는 오히려 명성황후 시해 현장이라는 비극의 역사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며칠전 잊혀질 법한 한세기전 문서 하나가 세상에 공개됐다. ‘을미사변’으로 불리는 명성황후 암살사건에 가담했던 일본 외교관이 사건 다음 날 “우리들이 왕비를 죽였다”며 시해 정황을 자세하게 밝힌 서한이 발견됐다는 보도를 접했다. 일본 언론 아사히가 보도한 내용이다. 역사가들은 “사건의 상세한 내용을 밝히는 중요한 1차 사료”라고 평가한다. 보도에 따르면 서한은 암살 실행 그룹의 일원이었던 현지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1865~1945)가 1895년 10월 8일 암살을 실행한 다음 날 고향 니가타현 나카도리무라(현 나가오카시)에 살고 있는 친구이자 한학자 다케이시 사다마츠(武石貞松)에게 보낸 것이다.    


           

1894년 11월 17일 자부터 이듬해 10월 18일 자까지 총 8편의 편지가 발견됐는데, 이 중 여섯 번째 편지가 사건 다음 날인 10월 9일 자다. 이날 편지에는 시해 현장에서 자신이 취한 행동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진입은 미리 담당한 대로. 담을 넘어 점차 어전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습니다”라고 암살 사실을 밝히고, “생각 외로 너무 쉬워서 오히려 놀랄 정도였습니다”라는 감상도 곁들였다. 서한을 검토한 전문가들은 “사건의 세부나 가족 등에 대한 기술을 보더라도 본인의 진필이 틀림없다”면서 “현역 외교관이 부임지의 왕비를 시해하는 데 직접 관여했다고 알리는 문서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밝혔다. 또한 “아직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은 사건의 세부를 밝히는 열쇠가 되는,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평가했다.   


  

아사히신문은 한반도와 일본 관계사에 정통한 나카쓰카 아키라 나라여대 명예교수(일본근대사)의 평가도 전했다. 나카쓰카 교수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쇼와 시대와 대비해 긍정적으로 말하기 쉽지만, 청일전쟁도 러일전쟁도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면서, “일본이 한반도에서 무엇을 했는가, 사건 후 120여 년이 지나 당사자가 쓴 1차 사료가 나온 의미는 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현지인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처신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문서공개로 다시한번 일제의 야욕과 무도함이 드러난 명성황후 시해의 현장이 바로 건청궁이다.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였던 고종은 이 궁궐에서 일본의 조선침략을 세계에 알리고 자주권을 찾으려고 부침했다.      


     

건청궁은 경복궁 내에서도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궁전'이라는 의미의 건청궁은 1873년 고종이 사비를 털어 지은 건물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이 있기까지 약 11년간 고종과 명성황후가 거처로 사용했다. 고종은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독립하여 친정을 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아버지에 의해 주도된 경복궁 중건과 별도로 은밀하게 경복궁 북쪽 신무문 가까이에 건청궁을 건립했다. 고종은 그 후 1894년 일본의 압력을 피해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가 한 달 만에 돌아왔는데 돌아온 곳도 경복궁이 아닌 바로 건청궁이었다.          



1895년, 을미년에 일어난 끔찍한 황후시해사건을 을미사변으로 부른다.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국권 유린의 첫장이다. 눈앞에서 한 나라의 국모, 그리고 왕비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손 쓸 방법이 없었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한낱 왜국의 칼잡이들이 한나라의 국모를 잔인하게 시해하고 그 시신마저 수습할 수 없을 지경으로 만들었다. 어디 이 뿐인가 이 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목숨과 조정을 지키기 위해 다른 나라의 공사관으로 도피행각을 벌였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일본은 경술국치까지 을사5적과 손을 잡고 일사천리로 한반도를 집어삼켰다.    


 

치욕의 역사를 불러온 것은 물론 우리 스스로의 책임이다. 외부의 변화에 눈을 감고 안으로 당쟁과 파벌, 지역과 출신을 따지며 편가르기에 열중한 결과는 참혹했다. 을사오적의 국권 팔아먹기가 국권침탈의 마침표였음은 확실하지만 이들의 매국행위만으로 역사의 치욕을 손가락질 할 수는 없다. 일제는 국권침탈을 진행하며 철저하게 조선황실의 권위와 상징을 조롱하고 없애는데 열중했다. 바로 그 출발이 궁궐의 파괴였다.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바꾸고 경복궁을 조선총독부로 가리는 행위는 시작에 불과했다. 1906년 조선 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제실(帝室) 재산정리국과 어원(御苑) 사무국을 총관하면서 성안의 여러 궁궐을 헐어 없애고 황제의 무료함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을 건설한다는 발표를 했다. 조선 왕실의 궁궐이 더이상 신성한 황제의 상징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놀이터로 전락하려한 일제의 속내가 담긴 공사였다.  


        

한세기전 한 왜인 외교관의 일기장이 공개됐다는 보도를 보며 왜 건청궁이 더올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건천궁 복원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갔던 10여년전의 기억이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친 황후의 저렁쩌렁한 목소리를 소환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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