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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오 Feb 02. 2022

아베, 왜 사도광산인가?

#보수 자극으로 결집 꾀하는 왜곡의 달인


가끔 오만방자(敖慢放恣)한 인간과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런 부류의 자들은 대체로 눈빛이나 용모보다는 태도와 말에서 교만이 흘러넘친다. 무엇보다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동작이 느리고 굼뜬 데다 말투는 비유나 은유를 즐긴다. 특히 이런 자는 상대가 약점을 보이거나 빈틈이 있다 싶으면 곧바로 자세를 바꾼다. 바로 아베 이야기다.

최근 일본 정부에서 아무런 명함도 갖지 않은 아베가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에 머뭇거리는 기시다의 목줄을 흔들었다는 후문이다. 결국 기시다 내각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인 사도(佐渡) 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기로 정식 결정했다. 사도 광산은 일제 강점기에 다수의 조선인이 동원돼 가혹한 노역을 강요받은 현장이다. 일본 측은 조선인 강제동원이 국제사회에 논란이 될 것을 미리 짐작하고 사도광산의 역사성 가운데 일제 강점기의 비열한 과거는 지운채 꼼수 등재를 추진하는 편법을 썼다.



일본 내부에서도 마이니치신문(每日) 등 극히 일부가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했던 사도(佐渡)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나섰지만 대다수의 언론은 뒷짐을 지거나 옹호하는 분위기다.

마이니치는 일본 정부가 당초 한국의 반발을 고려해 사도 광산 추천을 보류하려고 했으나,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비롯한 자민당 보수파가 소극적이라고 비판하자 방침을 바꿨다면서 “7월 참의원 선거를 염두에 두고 보수표를 의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제가 되는 사도광산은 일제 강제동원의 생생한 현장이다.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로 한번 재미를 본 일본이 사도광상 역시 비슷한 수순으로 셰계유산 인정을 받겠다는 것은 역사적 만행이다. 무엇보다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사죄조차 하지 않는 일본이 강제징용 현장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려는 것은 역사에 대한 부정이며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다.     



#왜곡의 뿌리, 열등감 감춘 일본의 우익


덮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인간사에서 덮어주는 행위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용서뿐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용서 받으려는 생각 자체가 없다. 그 배경에는 자신들에 대한 세계인들의 우호적인 시선이 여전하다는 착각이 깔려 있다.

사실 일본에 대한 세계인들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우호적이다.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의 태도, 일본의 자연과 일본인이 만든 제품에 대해 세계인들은 대체로 우호적이고 친밀감을 느낀다.


과거 일본이 잔혹한 전쟁범죄를 주도했고 학살과 만행을 일삼았다는 인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한 우호적인 여론이 일본을 교만하게 만들었다. 오직 자신들을 괴롭히는 것은 생생한 증거가 널려 있는 이웃 국가들 뿐이다. 그렇다보니 일본에게 강제징용이나 위안부는 눈엣가시다. 가능한 과거사를 덮고 일등 국가로 나아가려는 일본에게 살아 있는 강제징용의 증거와 위안부 할머니들과 그 생생한 증좌는 치우고 지나가고 싶은 과거다. 그래서 그들은 부인한다. 손사래를 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말간 얼굴로 뜬금없는 일이라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바로 그 중심에 아베가 있다.

아베의 과거사에 대한 메시지를 뜯어보면 그의 외조부 시대, 일장기가 태평양 곳곳에 펄럭이던 화려한 과거로의 자맥질과 다름 아니다. 어린 아베가 청년 아베에서 지도자로 변모할 때마다 그 자맥질은 도를 넘고 있다. 피로 얼룩진 가문의 유전인자가 매일 새로운 만행으로 세포분열을 거듭하는 것처럼 아베는 매일 새로운 만행을 꿈꾸고 있다.     



#잘못된 과거사 인식, 참회없는 질주


화려한 과거는 향수를 부른다. 초등학교 때 반장 안 해본 사람이 없고 옛날 자기네 집 금고엔 황금 돼지 몇 마리쯤 없던 집이 없다. 조상 중에 정승을 지냈거나 왜놈이나 오랑캐 수십쯤은 단칼에 베어버린 위풍당당한 선조의 무공을 전설처럼 간직한 우리네의 과장법은 술잔 뒷담화로 지금도 오르내린다. 과거가 그리운 시점은 현재의 불만이 잔을 채울 무렵이다. 허전하면 과거가 생각나는 법이다. 이사부 장군이 창검을 꽂고 눈을 부라리던 오랜된 과거, 동해 바다엔 왜구가 득실거렸다. 국가도 민족도 별 의미 없던 시절, 먹고살기 위해 노략질을 일상으로 삼던 무리들이 우리 땅을 제집 마당처럼 들락거렸다. 질서를 잡고 절차를 밟으라고 금을 긋고 예를 가르친 시간, 왜놈은 밝은 날엔 머리를 조아리다 어두워지면 관가의 창고를 털고 민가를 덮쳤다. 그 숱한 반복의 역사 속에 그들이 배운 건 훔친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오래 간직하는 법이었고 그 학습이 19세기 제국주의를 만들었다.     


인정하면 편한데 부정하려고 드니까 불편해진다. 거짓을 정당화하기 위해 숱한 거짓을 반복해야 하듯 일본의 역사학계는 거짓의 논리화에 달인들이 모였다. 문제는 여전히 일본의 지도자들이 한세기 전 욱일승천기를 들고 목젖을 세우던 제국주의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해바다에서 러시아 전함을 침몰시키던 오래된 추억은 화려하다. 그 화려한 전설의 중심이 제국시대의 추억이나 움켜쥐고 버틴다. 일본이 한반도를 무지에서 깨운다는 '일한동조론'에 기초한 한일관계사가 지배하는 뇌구조로는 일본의 우익들에게 과거사 인정과 사과는  불쾌할 수밖에 없다. 인정하면 쉬운데 무릎을 꿇어도 가슴 밑바닥에서 반성의 눈물이 쏟아지지 않으니 답답할 수도 있다. 원래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유전인자가 수천년 지속된 탓이니 어쩌랴. 그것이 바로 불편한 이웃을 가진 우리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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