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 1000년 전 다문화코드를 읽은 관용의 정신
반세기 이상 명맥을 이어온 처용문화제가 사라질 위기다. 지난해 56번째 축제를 끝으로 올해는 축제의 잔상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처용문화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역사를 가진 축제다. 울산이 동해안의 작은 어촌에서 공업입국의 상징이 된 날을 기념해 시작한 축제의 이름은 공업축제였다. 도시마다 그러하듯 승격기념일이나 시민의 날 따위에 고적대를 앞세우고 가두행렬을 뒤따라오게 하는 요란한 치장의 시끌벅적한 행렬을 기억하는 이가 많다. 지신밟기나 달집태우기, 강강수월래나 줄다리기의 오랜 세월의 놀이문화는 구식이 되고 신식 악기의 요란한 고음과 치렁치렁 휘감은 화려한 의상에 국적불명의 음률이 요란한 행진곡으로 둔갑해 우리네 축제에 깔렸다. 공업축제라는 이름의 축제는 그런 소용돌이 속에 공장 굴뚝에서 쏟아지던 검은 연기처럼 과거를 지웠다. 그 때 처용이 등장했다. 공업축제로 30년 가까이 이어온 울산의 대표축제는 얼마전 작고한 이어령 선생이 울산의 문화코드는 '처용'이라며 새로운 이름표를 달면서 처용문화제로 변용의 과정을 거쳤다. 바로 오늘 울산여지도가 여덟 번째로 이야기할 황성동과 처용암, 그리고 개운포의 역사다.
울산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울산의 현대만 기억하지만 사실은 울산이라는 지역은 한반도에서 인류가 가장 먼저 정착 생활을 시작한 땅이다. 그렇다면 과연 울산은 어떻게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어떤 문화를 만들어왔을까. 바다 쪽으로는 서생면 신암리와 황성동 세죽마을이 첫 정착지였고, 내륙으로는 삼동과 대곡, 옥현과 검단 일대가 선사문화의 첫 시작점이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선사문화의 시작점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여럿이다. 북구 중산동과 언양읍 동부리, 삼동면 둔기리, 온양면 삼광리, 상북면 덕현리, 중구 다운동, 삼남면 방기리 등지에서 각종 선사유적이 세상밖으로 나왔다. 이 가운데 유독 황성동 일대를 주목하는 것은 세죽마을 인근에서 쏟아진 흑요석(黑曜石) 화살촉과 고래뼈 때문이다. 항성동 일대, 즉 개운포는 한반도 해양문화의 근거지였다는 사실을 수천년 세월 뒤에 쏟아진 흔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무엇보다 '골촉 박힌 고래 뼈'는 울산의 신석기인들이 동물의 뼈를 날카롭게 가공한 도구를 가지고 고래사냥을 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흑요석이나 옥귀걸이 등은 대륙의 문화와 해양문화가 어떻게 울산에서 융합의 마술을 부렸는지 수수께끼 같은 신호음을 보내고 있지만 공업입국, 산업수도에 갇힌 사람들은 그런 따위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바다와 육지의 문화가 융합의 공간으로 뒤엉킨 황성동은 지금 황량하다. 그나마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던 세죽마을은 1970년대까지 50여가구 주민이 통발어업으로 제법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무엇보다 세죽마을은 처용암과 근처 목도(동백섬)까지 나룻배가 오가는 봄이면 상춘객이 몰려 봄나들이 최적지로 전국에 소문이 났다. 하지만 공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황성동 일대는 이황산가스가 갯바람을 타고 무시로 흩어졌고 호흡이 힘들어지자 1990년초 모든 주민이 이주했다. 사라진 마을은 세죽만이 아니다. 황암·용연·남화·용잠마을이 공단과 신항만 건설로 사라지고 망향의 돌기동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바로 이 처용암이 울산의 문화 상징 코드가 됐다. 중고등학교 시절 양주동 박사의 한글번역판 처용가를 공부하면서도 정작 처용이 울산의 문화적 상징인줄을 몰랐던 울산 사람들은 처용과 헌강왕, 망해사와 외동의 괘릉까지 이어진 문화유산의 유전적 연결고리가 줄줄이 엮어지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울산이라는 땅이 이 만큼의 인문학적 무게가 켜켜히 쌓여 있는줄 몰랐기에 머쓱했지만 한편으론 자부심이 뭉클 솟아올랐다. 그 때부터 울산은 처용암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문제는 양주동 박사의 우리말 해석 가운데 "밤드리 노니다가 들어자 자리보곤 가라리 네히어라"는 부분이다. 일부 과도한 종교인들이 이 부분을 부각하며 음란과 퇴폐의 문화코드라 지적하고 삿대질을 시작했다. 천박한 편견이다. 여기에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춤을 추며 역신을 물리친 부분을 무당의 제의로 풀어 미신과 퇴폐의 융합이 처용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해석본을 흔들기 시작했다.
처용이 울산의 문화적 상징코드라 외친 사람은 이어령 박사였다. 이 박사는 숨지기 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역신을 마마라고 불렀던 시대에도 그것을 달빛과 춤과 노래로 물리친 처용이 있었다."며 처용을 치유의 코드로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바로 그 처용의 출발지가 황성동이다. 개운포 바다를 품은 황성동은 선사시대부터 신라를 거쳐 조선조까지 해양문화의 창구와 수군들의 기지역할을 해왔다. 이같은 역사성의 바탕은 바로 개운포의 입지에서 찾을 수 있다. 외황강 상류의 구조는 바다를 낀 내만(內灣) 성격이 강해 국제무역항으로서의 틀을 갖췄다. 서라벌의 내항인 사포(반구동)와 외항인 개운포가 외항강 하구와 태화강 하구에 버티고 있는 구조는 서라벌이 가진 글로벌 항만의 기본 틀이었다. 그 틀이 오늘의 신항만이 됐고 서역과의 교류의 현장이 아랍의 기름을 하역하는 액체물류항으로 자리했다. 이 모든 스토리는 결코 우연은 아니다.
지금은 황량하기 짝이없는 모습이지만 처용의 관용정신이 치유의 코드로 웅변하는 황성동은 오래전 8세기 화창한 가을날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 한다. 신라가 국제사회와 소통하는 교류의 현장이자 아랍의 무역상들이 당나라 양주(揚州)와 함께 교역의 창구로 삼았던 전진기지였던 국제항이 바로 이 쓸쓸하고 찬란한 포구다. 그 까마득한 풍광은 떠나간 이주민들의 가슴에 새겨졌고 지금 처용암에는 가끔 해안에서 내륙으로 밀려드는 해무가 몸서리를 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