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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반짝 Apr 12. 2024

함부로 낙관하지 못하게 된 이유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첫 직장으로 요양병원에 취직을 했다. 요양병원은 다들 알다시피 돌아가시기 전의 치료와 간병이 필요한 노인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일반인들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노인분들의 경우에는 일상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으신 분들도 막상 치매검사를 해 보면 인지능력이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래서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분들은 정말 정신이 또렷하고 총기가 있으신 분들이 아니고서야 대부분 치매 진단을 받은 경우가 많다. 치매라는 진단이 너무 충격적으로 다가와서 그렇지 사실 우리 주변에는 치매가 진행되고 있는 분들이 엄청나게 많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다가 '저 사람은 나이 들어서 왜 저러나?'라고 생각하는 경우 사실 그분은 치매를 앓고 있을 확률이 생각보다 높다. 나는 진상을 부리는 사람을 볼 때 "아마 치매가 오셨나 보다."라고 말할 때가 있는데 내가 심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다.


내가 만나는 환자들 중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은 경증이든 중증이든 간에 치매 환자였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치매환자의 모습은 아니다. 위험한 사고를 치실 수 있는 분들은 약물이든, 보호대든, 여러 방법을 동원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게 된다. 대체적으로 내가 느낀 요양병원 병동의 모습은 귀여운 어린아이들이 있는 유치원과 같았다. 내가 일했던 요양병원은 병원비가 약간 비싸고 상당히 깨끗하고 괜찮은 병원이었다. 환자들은 분홍색, 보라색 옷을 입고 파스텔톤 병실에서 간병사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으면서 지내고 있었다. 치매에 걸려 인지능력이 떨어지게 된 환자들의 모습은 내가 볼 때는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어린아이들과 같았다. 말을 좀 안 듣고 떼를 쓸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미운 일곱 살이나 꿀밤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초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내가 느낀 감정은 귀여움이었다. 그곳에 입원하신 대부분의 환자들은 아마 자녀들이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젊은 시절에 사회적으로 잘 나가셨을 확률이 높았다. 치매에 걸려서도 그런 과거의 명함, 자랑거리에 집착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무 소용도 없는 귀여운 허세일뿐이었다. 지금 여기 다 같이 요양병원에서 지내며 함께 죽음을 코앞에 두고 살아가는 마당에 모두가 똑같이 평등할 뿐이지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환자들이 같은 병실 다른 환자를 가장 많이 질투할 때는 그 자식들이 자주 찾아와 살뜰하게 보살피며 부모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일 때였다. 요양병원에서 환자들은 젊은 시절 자식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지 여부를 고스란히 돌려받게 된다. 그때 나는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과거를 돌이키고 자식에게 미안해하는 분은 정말 거의 없었다. 내가 본 거의 대부분의 잘못을 저지른 부모는 끝까지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을 눈곱만큼도 가지지 않은 채 돌아가셨다. 내가 본 가장 미웠던 분은 젊은 시절 아내가 죽자 자식을 버리고 젊은 여자와 결혼하여 나 몰라라 하며 살았다. 그리고 지금 와서 자식이 자신을 돌봐주지 않고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자 펄펄 뛰었고, 자식은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으려 했고, 아버지는 펄펄 뛰며 두 번이나 자살 시도를 했다. 나는 내가 그렇게 정성스럽게 아픈 곳을 보살펴 드렸는데 잔인하게도 자살시도를 한 것에 너무 화가 났지만 속으로 좌절스러웠나보다 하고 그분을 만나러 갔는데, 좌절이 아닌 분노와 보복감이 그분을 자살시도하게 만든 것을 알고 정말 그분이 미워졌었다. 그분의 자식도 모질기도 하고 잘못한 것도 맞았지만 차마 비난하기가 어려웠다. 자식 입장에서는 정말 죽어도 화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나는 요양병원에서 치매 환자들과 항상 함께 재미있게 놀았다. 장난도 치고, 안아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떼쟁이들을 혼내주기도 했다. 심한 치매 환자들은 가만히 있으면 점점 기능이 쇠퇴되기 때문에 그전에 했던 놀이를 잊어버리지 않게 계속해서 똑같은 놀이를 해 주어야 했다. 나는 모든 환자들에 대해 각각 다른 방식을 사용해 상호작용했다. 사회에서의 인간관계와 똑같았다. 내게는 그 당시의 환자들의 예쁜 모습들이 담긴 수많은 사진들이 있는데, 나를 보고 활짝 웃거나 인사를 하는 사진, 치매 환자의 재미있는 일상을 담은 사진들이 많이 남아있다. 나는 요양병원에서 최대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당시 그 요양병원에서 가장 어린 직원이었는데, 인기가 거의 환자들의 아이돌 수준이었다. 환자들도 나를 예뻐하고, 나도 환자들을 예뻐했다.


사실 나는 요양병원에서 일하는 것이 행복하면서도 견디기 힘들 만큼 힘이 빠지고 힘들었는데, 내가 그 환자들을 아무리 보살펴주고 놀아주고 도와주려고 노력해도 그분들은 계속해서 쇠퇴되고 나빠지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중환자실로 들어가 임종을 맞이하시게 된다. 심지어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어제까지 멀쩡히 환자가 앉아있던 병실 침대가 갑작스럽게 텅 비어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마음이 쿵 내려앉으며 너무나도 힘들었다. 내가 출근을 할 때 지하 장례식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출근을 했는데, 매일 출근을 하며 나는 오늘은 누가 돌아가셨을까 장례식장 명단을 보며 확인을 해야 했다. 매일 아침이 가슴이 쿵 내려앉을지 아닐지를 가늠하며 조마조마했다. ICU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완전히 말라버린 그분들의 마지막 고통스러운 숨소리,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었을까? 나는 그분들의 손가락이라도 잡아주며 위로가 되어주고 싶었다. 모두가 자기 인생의 마지막에서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는 가장 두렵고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싸움이라고 말해도 될까? 두려움에 흐려진 눈과 정신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들.. 고통에 반응할 힘조차도 없이 겨우겨우 힘겹게 이어져가는 숨소리.. 아무런 꿈도 소망도 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며 고통을 피하지도, 고통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살아도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사람들의 모습을 나는 보았다. 정말 죽으면 다 끝일까? 그 죽음까지 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나는 아이를 가지고는 싶지만 자연분만은 절대로 꿈도 못 꾸고 제왕절개를 하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겁이 많은 사람이다. 아이를 낳는 것은 아마 죽을 만큼 아프고 힘들 것이다. 그러니 진짜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아프고 힘든 과정이겠는가.. 진짜 말 그대로 죽도록 아프고 힘들 것이다.


나는 환자들을 대체적으로 다 좋아했지만 특별히 나의 편애를 받는 분들이 몇 있었다. 솔직히 치매에 걸리기 전부터 성격이 좋고 예쁜 마음씨를 지니고 있던 분들은 치매에 걸려서도 예뻤다. 성격이 나빴던 분들은 치매에 걸리고도 똑같이 성격이 나빴다. 사리분별이 잘 되지 않으니 나쁜 성격이 더 자주 드러나게 되고 미운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저분이 치매가 오셨나 보다'라는 말을 욕으로 쓰지 않는다. 치매에 걸려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원래 성격이 나빴을 확률이 훨씬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나는 치매에 걸려서도 소녀 같이 수줍은 시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는 할머니들을 좋아했다. 치매에 걸려 아무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분의 눈빛, 나를 바라보는 표정을 보면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연히 보호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내가 짐작한 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 "우리 어머니는 정말 소녀 같은 분이세요. 정말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고 사셨어요." 나는 호수 같은 그 할머니의 눈빛과 어린 아기 같은 순수한 영혼을 사랑했다.

나는 그분의 죽음이 다가오게 되면서 신체 상태가 나빠지고, 아마도 본인의 죽음을 인지하지는 못하셨겠지만 그분의 눈빛과 표정이 점점 슬픔과 두려움에 빠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마음이 아파 죽을 것만 같았다. 내게는 아기와 같은 존재인데.. 아기가 울고 두려워하면 안아주고 달래주고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해주면 되지만, 내가 그분에게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 분은 실제로 죽게 되실 것이었고 모든 것이 괜찮지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그분이 잘 알아들으셨을까? 나는 두려워하는 어린 아기를 홀로 죽음을 맞도록 내버려 두는 기분이었다. 내가 당시에 입 안에서 맴돌다 슬쩍 위로하며 얘기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그분은 알아들으셨을까? 나는 진심으로 그분의 두려움과 공포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 슬픈 눈망울도 내 사진첩에 남아있다. 마음이 너무나 아파서 눈물이 난다. 한번 더 안아주고 좀 더 잘 위로해 줄걸, 좀 더 밝고 아름다운 얘기를 들려줄걸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번은 정말 아름다운 분을 본 적이 있다. 그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고 다만 도리도리로만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셨지만 항상 평화로운 미소와 밝은 빛 같은 얼굴을 하고 계셨다. 내가 다가가면 그분은 내 손을 입으로 가져가서 깨무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쳤다. 그분은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런 환한 빛 같은 얼굴을 계속 유지하셨고 천사처럼 돌아가셨다. 나는 그분을 잊을 수가 없어 지하 장례식장에 내려갔었는데 그분의 따님이 내게 어머니가 나를 많이 예뻐하셨다며 그분이 생전에도 천사 같은 분이셨고 교회 권사님이셨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나는 그분에게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구나 하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와 같이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날은 내 담당 환자가 아닌 사람이 갑작스럽게 내 눈에 들어왔다. 아무 말 없이 평화롭게 가만히 앉아 계시는데 이상하게 눈길이 가서 너무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나를 소개하고, 앞으로 매일 인사하며 지내자고 했다.

그분은 그날 점심시간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코드블루가 뜨고 모두가 병실에 뛰어올라가 심폐소생술을 했다. 평소 건강하셨기 때문에 DNR(연명치료 포기 각서)도 받아놓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이 그분의 생신이셨는데 자손들이 모두 요양병원에 방문해 함께 식사를 하며 인사를 나누셨다고 했다. 그렇게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나누시고 나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나신 것이다. 그날 왜 나는 갑자기 내 담당환자도 아닌 분께 그렇게 인사를 해야겠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을까..


그런 일이 있었던 반면에, 완전히 반대의 상황도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노인환자인 요양병원에 어쩌다가 젊은 환자가 입원할 때도 있다. 보통은 수술 후의 요양을 위해 입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때는 2-30대의 젊은 여자 환자가 입원했는데 성격과 목소리가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점심시간에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 환자가 높은 소리로 고래고래 지르는 비명소리로 병원이 아주 시끄러웠다. 아~악!! 악!!! 나 죽을 것 같아~! 죽을 것 같다고~! 어떻게 좀 해봐~!! 하고 지르는 비명소리는 내게는 너무 억지스럽게 들렸다. 나는 속으로 '여기 진짜 돌아가실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저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것일까.. 목소리가 저렇게 힘 있고 쌩쌩하면서.. 저분은 절대 안 돌아가실 것 같다'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것이 정말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그분은 그날 밤 돌아가셨다. 급성 패혈증이 왔던 것이다.

나는 그분이 그날 소리를 지를 때 정말 진심이었는지 난리를 친 것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날 이후로 사람의 목숨에 대해서 절대로 함부로 낙관적인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심지어 사람은 자기 자신의 거짓말에 속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볼 때 그 사람의 말이 거짓말인 것이 확실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나는 일단 속아주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러면 너무 그 사람이 억울할 것이고, 실제 거짓말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게 된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거짓말을 한 것을 지적할 것이 아니라 어차피 본인도 스스로 거짓말하는 것을 알 테니 스스로 자기 속마음을 돌아볼 수 있게 기다려주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스스로 거짓말하는 것도 모를 정도이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동기조차도 완전히 사라져 버린 채 거짓말을 위한 거짓말을 하게 된 갈 데까지 가 버린 사람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완전히 알 수는 없으니, 최대한 선한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인을 억울하게 만들지 않는 방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짜 서럽고 억울한 사람을 만드느니 차라리 내가 조금 서럽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 낫다. 환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도 진짜 거짓말인지 아닌지 그 속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저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어떡할 것인가. 또한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이 사람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혹시 모르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다. 이것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매 순간을 타인과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것처럼 진심을 다해 말을 건네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위험에 대해서는 최대한 경계하고, 선한 일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최대한 믿어주고 싶은 것이 나의 마음이다. 환자가 아프면 섣불리 낙관적으로, 쉽게 긍정적으로 편하게 생각하지 말고 최대한 이 환자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과 아픔을 다 고려하여 최선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게 내가 후회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식이다. 환자에게 겁을 준다고 과잉진료라는 오명을 쓰거나 오진을 내렸다고 돌팔이 소리를 들으면 어떠랴? 100명에게 돌팔이 소리를 듣는 것보다 1명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더 소중하지 않은가? 우리 하나님도 그런 분이시기에 나도 한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가장 귀하다는 말을 항상 기억하려고 한다. 오늘 내가 실수함으로 있어서 내가 대하는 사람의 영혼이 시험에 들거나 생명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항상 기억한다면 모든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그리고 매사를 대함에 있어서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타인에 대해서 섣불리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알까? 그 사람이 남몰래 겪었던 깊은 고통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판단할 수가 있을까? 나는 내 삶이 너무나 힘들었고 남모르는 고통이 많았기 때문에 혹시 나와 같은 사람이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이 생길까 봐 정말로 다른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 않다. 물론 나도 수없이 많은 섣부른 판단을 하지만 나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다.


깊은 고통에 있는 사람에게 위로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거야'와 같은 말은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믿지 않는 한은 섣불리 해서는 안 될 말이다. 그 사람이 진짜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수 있을지 없을지 그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최선을 다해 진심을 다해 그 사람에게 소망을 심어주기 위해 영혼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다. 나와 같은 사람도 회복하였다, 나도 같은 고통을 겪었지만 정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맞더라고 얘기해 주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더 기도하기를, 나를 더 아름답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한다. 그래야 내가 깊은 절망과 고통에 빠져 있는 다른 사람에게 소망과 빛을 강력하게 전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아.. 나의 영혼의 고통! 날카롭고 예리한 칼로 수천억 번은 베어지는 듯한 고통, 면도칼로 내 모든 살갗을 찬찬히 얇게 썰어내는 듯한 고통, 누군가가 강한 창으로 끝도 없이 반복해서 내 심장을 잔인하게 찔러버리는 듯한 고통, 내 모든 몸이 찢어지고 또 찢어져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 덤프트럭이 돌진하여 끝없이 나를 치는 듯한 충격, 높은 곳에서 끝없이 반복하여 추락해 땅에 부딪혀 산산조각나는 충격, 하늘에서 수천 개의 칼날이 나를 향해 비처럼 내려오는 듯한 고통, 한 발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아픔, 숨을 쉬고 밥을 먹을 때마다 한 주먹의 유리가루가 내 몸속에 들어와 모든 곳을 파고드는 듯한 아픔, 심장이 쥐어짜이고 내장이 끊어지는 듯해 바닥을 긁을 수밖에 없는 그 고통을 어떻게 다 말할 수가 있을까!

아.. 내 영혼의 두려움! 도저히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이 끔찍하고 비참했던 나의 영혼의 모습, 다 썩어 진물이 흐르는 시체이면서도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너무나 무섭고 징그러웠던 내 영혼, 제발 이제 잊으라며 땅 속에 묻어버려도 너무나도 한이 맺혀서 두 눈을 부릅뜨고 천년만년이 지나도록 썩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내 영혼,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도 아닌 끔찍하고 비굴하고 구차한 내 영혼! 나조차도 바라보기 너무 혐오스럽고 감당이 되지 않아 제발 죽어주었으면, 제발 사라져주었으면, 제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주었으면 하고 바랬던 너무나도 외면하고 버리고 싶었던 그 존재, 아픈 것을 넘어서서 수천번이고 죽어버렸으면서도 죽지 못한 내 영혼을 불쌍하게 여기고 끌어안게 되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고뇌와 고통의 밤들을 보내야 했는지..

나는 내가 죽지 않은 것이 너무나 징그럽고 싫었다. 그토록 죽도록 간절한 살의를 가지고 진심으로 끝까지 죽이려고 했으면 그냥 그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모르는 척 순순히 눈을 감고 곱게 죽어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지 왜 굳이 굳이 욕심스럽게도 살아남으려 하는 것인지 그 탐욕이 너무나도 싫고 혐오스러웠다. '제발 누군가 너를 죽이려고 하면 곱게 죽어라, 이렇게 처참하고 끔찍한 모습이 되어서도 정말 구차하게 끝도 없이 살아남으려고 하는 네가 너무 싫다, 대체 살아서 무슨 좋은 꼴을 보려고 너는 이렇게 고집을 부리느냐, 너는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 차마 보기도 힘든 지경이다, 다른 사람들도 도저히 너를 봐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모습이 되고도 뻔뻔스레 살려고 하는 것이 창피하지도 않으냐, 그렇게 비굴하게 살아 뭐 하겠느냐, 구차하게 굴지 말고 제발 이제 그만 깨끗하게 포기해라.'는 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가졌던 마음이었다. 나는 내가 너무 싫었다. 죽을 위기가 닥쳤을 때 그냥 눈을 감고 숨을 쉬지 않고 끝내고 싶었는데 또다시 죽지 않고 계속 계속 살아가는 내가 너무 싫었다. 아무도 나의 상처를 돌아보지 않아 누구에게도 위로를 받지 못한 채 또 꾸역꾸역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나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비참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나를 죽이려고 한 사람이 남들에게 착한 척을 하는 거짓말의 증거가 되어주는 것 같았다. ‘쟤는 자기밖에 모르고 혼자 공주 대접을 바라면서 쬐끔만 비위를 맞춰주지 않으면 억울하다고 저렇게 난리를 친다니까.’ 나는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맞다. 내가 어떻게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신경쓸 수가 있었을까? 내가 차라리 그때 죽었더라면.. 그러면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불쌍한 아이였는지 안쓰러워하고 눈물 흘려주었을까.. 하지만 그 당시에도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죽기 적절한 타이밍은 없었고 언제 죽었다 치더라도 눈을 못 감을 만큼 한이 맺히기만 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죽는다고 해도 아무도 나의 깊이 한 맺힌 삶을 알지 못해 눈을 감을 수도 없었고, 나를 죽인 사람은 오히려 불쌍한 행세를 하며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을 것을 생각하면 더 눈을 감을 수가 없어 무덤에서라도 벌떡 일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죽지 않고 살아간다고 해서 어떻게 또 그 한을 풀 수가 있었겠는가.. 내 편은 아무도 없었고 나를 믿어줄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대체 내가 이렇게 계속해서 살아간다고 해서 어떻게 우주 반대편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나의 뼛속까지 새겨진 깊은 한이 풀릴 수가 있을지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죽을 수도, 살아갈 수도 없었던 내 인생!

아.. 나를 죽이려고 하는 그 살인자에 대한 두려움! 내 마음의 눈으로 내가 두려워하는 실체를 마주하려고 했을 때 나는 마음속에서 사탄의 모습을 보았다. 짐승과 맹수 같은 그의 증오심과 살의, 너무도 번쩍이고 단단하여 살아있는 몸 같지 않은 그의 새카만 갑옷, 너무도 강한 실체로 느껴지는 존재, 너무도 두려워 얼굴을 가리고 도저히 바라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을 곁눈질로 바라보았을 때, 나는 내 눈앞에서 나를 향해 눈에서 살기를 뿜으며 이를 갈고 있는 존재를 보았다. 그는 내 앞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나를 삼킬 궁리만 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미치도록 죽이고 싶어 하는 살인자의 강력한 존재감을 느끼며 벌벌 떨면서 예수님께 나를 보호해 주고 대신 싸워달라고 죽도록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피투성이라도 살라!”

내게 죽도록 잔인하고 야속하게 들려왔던 그 한마디가 지금은 내게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 되었다.


이런 고통도, 이런 두려움도, 이런 절망도 하나님께서 찬란한 기쁨으로 바꾸셨다고,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춤출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 삶으로 반드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명백히 보여주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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