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3F 반응이라는 것이 있다.
freeze-flight-fight의 투쟁, 도피, 경직 반응이라고 한다.
투쟁 혹은 도피는 싸워서 이길 기회가 있거나 도망갈 기회가 있을 때 반응하는 것이다.
경직 반응은 공격자에게 압도당하고 생존의 희망이 없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다. 이때는 신체가 무생물처럼 얼어버려 살아 있는 먹이를 공격하는 공격자가 흥미를 잃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경직반응 자체도 실은 아예 무력한 것이 아니라 포식자의 흥미를 잃게 하고 혈압을 낮춰 혈액량을 줄이는 등 생존확률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교통사고가 나는 등의 극심한 고통에서 신체가 의식을 잃는 것 또한 감당할 수 없는 트라우마에서 정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나는 과거에 살아오면서 freeze 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숨도 못 쉬고 발걸음 하나도 조심하며 죽은 듯이 살았다. 내 생존은 운명에 맡기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긴 기다림의 시간 끝에 내게도 생존할 수 있는 여러 자원이 생기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 세상에 대한 믿음,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했다. 그리고 생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바로 집과의 연락을 끊고 몸을 숨겼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연약한 인간일 뿐인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에 충분히 강하지 못하고 마음이 약하다고 비난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물론 적절한 격려는 필요하다지만 약한 것을 왜 비난하는가? 적자생존이라고? 정글의 법칙이라고?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만 빼놓고는 모두가 다 죽어도 아무 말 못 한다는 논리 아닌가? 그렇게 치면 하나님 외에 누가 무슨 자격으로 큰소리를 친단 말인가?
내가 볼 때는 자기가 힘 좀 세고 머리 좀 똑똑하다고 꼴값 떠는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건강도 젊음도 다 잃었을 때도 그런 말 할 수 있을까? 나는 요양병원에서 꼴값 떨며 목에 힘주던 사람들의 그렇고 그런 최후를 수도 없이 많이 목격해 왔다. 저런 사람들 중 극단적인 경우는 나에게 ‘장애인들은 솔직히 아무런 가치가 없는데 내가 지도자라면 사회에서 배제하고 안락사를 시키는 것이 어떨지 고민한다 ‘고 말했다. 이런 인간은 악이 왜 악인지도 모르고 히틀러가 왜 욕을 먹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인간이다. 나는 이런 인간들이나 적자생존 약육강식 힘의 논리에 굴종하는 인간들이나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악은 고상하고 화려한 말로 지혜롭게 포장한다 해도 본질은 그대로 악이다.
약한 존재는 강하지 못해서 죽어도 싸다면 왜 사람들은 약하고 순수한 존재를 사랑하는가? 강아지, 꽃사슴, 들에 핀 꽃들에게는 왜 강하지 못하다고 호통을 치지 않는가? 약해서 도망가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것이다. 본인의 연약함을 지각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고 자신이 무슨 터미네이터라도 되는 양 스스로를 절대 죽지 않는 철인처럼 취급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태일 뿐이다. 사람은 모두 각기 연약한 존재이다. 연약함에 대한 연민과 포용 없이는 모든 사람에게 철인이 되기를 요구하는 디스토피아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강아지는 관대하게 우쭈쭈 귀여워하면서 정작 내 앞에 있는 연약한 사람에게는 강하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이중잣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모습이라 하겠다.
경직, 도피에 대한 이해 없는 투쟁은 투쟁을 위한 투쟁일 뿐이다. 할 수 있는 것이 투쟁밖에 없어서 투쟁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생존에는 유리하지 않다. 투쟁-도피-경직 세 가지 반응이 상황에 맞게 적절히 반응되는 사람이 생존에 가장 적합하다.
싸움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통제하려는 욕심은 건강한 성장에 수반되는 자기 초월과는 명확히 다르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기 때문에 자기자신을 초월할 수 있고, 타인의 성장 가능성 또한 바라보기 때문에 타인을
쉽게 경멸하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을 거스르는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끝없는 고통에 시달리며 싸움을 위한 싸움을 끝없이 계속하게 될 뿐이다.
나는 솔직히 겁이 많은 사람이다. 겁이 많은 것으로는 세계 최고가 아닐까 싶다. 몸도 마음도 연약해 상처와 충격을 쉽게 받는다. 지난 달 가사조사를 받고 전남편의 눈물을 동반한 끝없는 거짓말에 충격을 받아 월경마저 끊겨 한 달을 건너뛰어 버렸다. 솔직히 너무 충격적이고 무서웠다. ㅠㅠ 결혼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짧은 혼인기간 동안 나는 충격적인 일이 있을 때마다 신체적으로 월경이 끊길 정도로 충격을 받았었다. 나는 내가 정말 연약한 사람인 것을 안다.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날개 아래 숨어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시기를 기도한다.
생각해보니 내가 도망치는 건 겁쟁이다. 겁이 많으니까.
그래, 난 겁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