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by 가로등 책방

노아는 물류 창고에서 우편물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시간이 없다. 이제 겨우 하루를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노아는 서둘러서 짐을 싸 오토바이에 올랐다. 노아는 천천히 오토바이에 속도를 올렸다. 이상하다. 분명 계기판의 속력은 이전과 같은데, 어쩐지 운전을 하며 스쳐가는 바람은 이전에 비해 훨씬 날카롭게 느껴졌다. 날이 추워진 탓일까. 마음이 급해진 탓일까. 노아는 고민해 봤지만 이렇다 할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오토바이가 오를 수 없는 계단을 올라 달동네의 편지를 전달할 때, 강이 훤히 보이는 빌라의 계단을 오를 때, 노아는 더 이상 풍경을 보지 않았다. 왠지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흐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속도 빠른 시간에 발맞춰 하루를 살아내려면 잠시 멈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전시회장에 다녀온 후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언덕 위의 토스트 노점 트럭을 지날 때, 노아는 잠시 옛 감상이 들기도 한다. 왠지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강의 사진을 찍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 기억에 잠시 아련해지지만 노아는 이내 정신을 차려 오토바이를 몬다.

밤이 저물고도 몇 시간 후에야 노아는 우체국에 들러 오토바이를 반납하고 퇴근했다. 이미 밤이 늦어서일까. 노아는 편의점을 지나쳐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정리하고, 거실로 들어가 잠시 베란다를 쳐다보다가. 그대로 방으로 향했다. 노아는 씻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천장이 핑핑 도는 것 같이 느껴진다. 혹시나 지구의 자전이 너무도 빨라 그것을 느껴버리는 것이 아닐까. 노아는 잠시 걱정했지만 몰려오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버렸다.

눈 뜨면 다시 하루가 시작되고 시간에 쫓기기 시작한다. 노아는 어쩐지 하루가 짧게 느껴졌다. 노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시간이 빨라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미 시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남들처럼 그럴듯하게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것은 노아의 생각이나 자아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노아는 껍데기 속에 갇혀있었다. 어쩐지 노아의 시간만 빠르게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노아는 그렇게 느꼈다. 물류 창고에 도착하니, 염병 아저씨는 여전히 투덜거리며 느릿느릿 우편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노아는 확신했다. 나의 시간만 빠르게 흐르고 있다고.


노아는 몇 주간 휴가를 냈다. 다행히 그간 특별히 어디 놀러 가지도 않고 휴가를 모아 온 탓에 꽤 길게 휴식을 할 수 있었다. 쉬는 동안 노아는 천천히 이 느린 마을을 돌아보기로 했다. 길가를 일정하게 수놓은 가로수와 꽃, 다리 하나하나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해보기도 하고, 함이 없는 달 사장네 바에 놀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시간은 이미 노아의 속도와는 달리 너무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노아는 늘 이 마을이 느리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아의 속도는 이 마을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노아의 속도는 이 마을과 같지 않음을 노아는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추억은 늘 속도가 느리다. 노아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속도가 안 맞아 떠난 이들이 떠나온 곳을 바라보면 느리게 보일 수밖에 없다. 노아는 마을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옘병. 영영 안 올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가더니만. 결국 돌아왔네. 이렇게나 오래 직장을 비우다니. 무슨 일 있는 겨?” 염병 아저씨는 반가운 듯 노아에게 말했다.

“그렇게 됐네요.” 노아는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저씨. 저 마을을 떠나기로 했어요.”

“옘병? 이렇게 갑자기? 요즘 표정이 안 좋더니,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요. 저도 아직 젊으니까 도시로 좀 나가려고요.”

그러자 염병 아저씨는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살기 좋다 어쩌다 해도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나가야 하는 거야. 옘병. 아쉽네.”

“그동안 고마웠어요.”

노아는 염병 아저씨와 짧은 포옹을 했다.

“어딜 가서든 잘할 거야. 자넨 마음씨가 착한 청년이니까.” 염병 아저씨는 웃으며 말했다. “아참! 자네 그 검은 봉투 기억하나?”

노아에겐 잊고 있던 아주 오랜 옛날 기억처럼 검은 봉투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 맞아요. 그런 게 있었네요. 어쩐지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던데.”

“내가 자네 쉬는 동안 자네 대신에 그 마을을 담당했거든. 근데 어느 날 오토바이를 몰고 하얀 대문을 딱 지나려 하는데, 글쎄 그 집 앞에 참한 아가씨 한 명이 검은 봉투를 들고 서있더라고.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말이야.” 염병 아저씨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내 말대로 연애편지가 맞더라고. 옘병. 남자애는 뭔 일이 그렇게 바쁜지 답장 한 번을 안 해준대 글쎄. 내가 그 자리에 서서 아가씨 들으라고 남자애 욕을 실컷 해줬지. 그러고 나서 오토바이를 몰고 나오려고 코너를 딱 트는데, 아니 어떤 노인 한분이 멀뚱히 서계셔서 사고가 날 뻔했지 뭐야. 우리 얘기를 들은 건지 멀찍이 서서 아가씨 쪽을 쳐다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는데. 놀라서 한마디 하려다가 하도 슬프게 울고 계셔서 그냥 왔어. 옘병. 노인네 귀도 밝아.”

어떤 기억이 떠오를 듯, 노아는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으나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한 주를 조금 넘게 버티고, 노아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많지는 않지만 그간 조금 모은 돈을 들고 도시로 나가 정착해 볼 생각이었다. 이사 가는 날, 이미 짐을 빼 텅 빈 집에서 노아는 마지막으로 두고 온 것은 없는지 신발을 신고 집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베란다에 눈길을 한번 주고는, 문을 닫고 집밖으로 나섰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때 아닌 장마를 보도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는 몇 날 며칠 쏟아졌다. 몇몇 전문가들은 지구온난화가 문제라며 과도한 이산화탄소 배출이 장마의 원인이라 설명했다. 추운 날씨에 비까지 내려 사람들은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어 옷이 젖는 것을 피해야만 했다. 어떤 이들은 추운 날씨에 설마 고인 비가 얼까 싶어 바닥에 모래를 뿌려댔다. 또 다른 이들은 이런 날씨에는 비가 우박으로 바뀔 수 있다며 개인 사유 논밭에 보호 천막을 설치했다. 모든 것이 전에 본 적 없는 광경들이었으나 그 누구도 세상이 끝났다고 말하진 않았다.

구름이 잔뜩 낀 어느 날, 바람에 구름이 걷히며 숨어있던 달빛 한줄기가 텅 빈 집 베란다를 비추었다. 그곳엔 벽에서 떼어낸 둘둘 말린 영화 포스터 한 장과 다 녹은 아이스크림 하나가 비닐째 곱게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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