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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Oct 21. 2021

허물없이 하루가 간다


“토요일 아침에 머하노? 매주 불암산 감. 시간 될 때 갈려?”      

    

“카톡!” 경칩을 앞둔 어느 목요일 밤. 한통의 카톡. 격주로 진행되는 글쓰기 모임의 문우이자 책방 대표에게서 카톡이 왔다. 책방 대표하고는 작년 겨울부터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며 가까워졌다. 사람 좋게 생긴 인상과 ‘경상도 싸나이’ 특유의 호방한 성격 덕에 우리는 호형호제하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책방 형님은 글쓰기 모임의 문우 한 명과 함께 매주 산에 오르고 있는데 나도 같이 가자고 했다. 날짜를 보니 대학입시 추가모집 마감 다음날이었다. 지친 몸과 마음의 재충전이 필요했던 터라 흔쾌히 수락했다. 약속한 산행 전날,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느라 산행보다는 잠을 택했다. 그렇게 산행은 일단락되는 듯싶었다.    

            

 “낼 산 가자!”

 “낼 산행?”

 “이번 주는 산행 가자! 불암산”          


코로나19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한 지 어느덧 수개월. 방역시스템에 같이 동참하고 있다는 자부심과는 별개로 옅은 우울감이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시때때로 원인 모를 외로움이 찾아들었다. 날씨도 좋고 내가 좋아하는 봄도 왔는데 이상하리만큼 나는 무기력해져 갔다. 도무지 뭘 하고 싶지도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다.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책방 형님의 등산 가자는 카톡이 왔고, 나는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을 했다.    




8년 전,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를 왔다. 이 동네를 선택한 이유 중에 하나는 아파트 단지 뒤에 황금산이라는 산이 하나 있어 운동 겸 등산을 할 수 있지 않을까였다. 생각과는 달리 지난 8년 동안 단 한 번도 이 산에 오르지 않았다.     


지난 두 달간 책방 형님의 등산 가자는 카톡 때문이었을까? 봄은 왔는데 무기력한 나를 마주하는 게 시뜻해서였을까? 한 달 전부터 무작정 황금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여파로 ‘확찐자’가 된 나는 해발 128m의 나지막한 황금산을 오르는데 몇 번이고 숨을 골라야 했다. 옅은 우울감도, 무기력증도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숨이 찼다. 죽지 않을 만큼 힘들었다. 지금은 10여분이면 오르는 산 정상을 30분도 넘게 걸려 겨우 도착했다, 헐떡이는 숨과 함께.     


산 정상에 오르자, 성취감과 함께 나의 저질 체력에 화가 났다.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며 올라왔는지 셈을 해봤다. 8번. 해발 128m를 올라오는데 8번이나 쉬어야 하다니. 지글지글 내연하는 자괴감과 함께 이래서 되겠나 하는 오기가 생긴다.          


황금산과의 만남은 지난 한 달 동안 계속되고 있다. 이제는 한두 번 정도 숨을 고르면 오를 수 있는 밍밍한 산이 됐다. 체력이 어느 정도 올라오니 비로소 산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새순이 돋아난 이름 모를 들풀과 인기척에도 도망치지 않고 지 할 일 다 하는 청설모, 초록의 청량함을 가득 담은 햇살, 비비쫑 비비쫑 맑고 청아한 종달새 소리까지. 황금산은 연초록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내 마음도 연초록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뱁새도, 인적도 구름인양 간 곳 없는 황금산 정상 정자. 이 정자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묻는다, 산에 오르는 이유를. 묻고 묻지만 답은 아직이다. 한 지인의 말처럼 답이 없는 게 답일 수도 있을 터. 때때로 바람이 분다, 머무르지 않고 지나가려고. 해는 설핏하고 황금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허물없이 하루가 간다.         



산경(山景) /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 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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