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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Oct 22. 2021

계획된 우연


그렇지 않을지라도 좌로나 우로나 걸어가리.”



책상에 앉아 하루를 복기復碁한다. 여느 때처럼 평범한 하루를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도 그 기대는 거절당했다, 직장인이라는 이유로. '등' 한 글자 때문에 공들여 작성한 기획(안)이 되돌아왔다.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친한 동료와 필요 없는 논쟁을 했다. 저녁 약속이 있었는데 오늘도 야근이란다. 


오늘도 내 앞엔 예상치 못한, 내 계획과는 다른 시뜻한 일들이 펼쳐졌다. 늘 그랬던 것처럼. 늘 그러하니 이젠 심상한 일상이 되었다. 일상이 되니 생각과 다를지라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다지 놀랍지 않다. 심지어 언제부턴가 그 안에서 나름대로 열심이다. 그게 어떤 상황이 되었든 간에.




돌아보면, 내 삶의 8할 이상은 내가 계획하지 않았다. 우연히 접한 것들에 반응했을 뿐이었다. 인생의 전환점마다 난 합리적으로, 객관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 노력과는 달리 삶은 내 계획대로 따라와 주지 않았다. 결혼, 대학원 진학, 첫 직장, 이직, 극단 활동, 시집 출간 등등... 크고 작은 변곡점에 늘 ‘우연’이 자리했다.


캐나다 유학시절 우연히 출석하게 된 교회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학부 때 '중문인의 밤'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접한 연극 덕분에 대학원을 진학했다. 중국어를 전공했다는 이유로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우연히 일하게 되었다. 우연히 접한 신문기사로 인해 지금의 학교로 이직했고, 몇 해 전에 10년 근속 표창도 받았다. 어느 날, 아들 녀석이 내게 '아빠는 꿈이 뭐야?'라는 질문에 직장인 극단 활동을 우연하게 시작하게 되었다. 메모장에 글적이던 글들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그게 계기가 되어 생각지도 않게 시집 출간도 했다.




당시에는 내가 했던 행위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시간이 휘끈 넘어갔다. 금시발복(今時發福)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런 행동들이, 그런 결정들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우연'에 반응했을 뿐인데, 그 '우연'이 내 삶을 이끌고, 만들어왔다.


‘우연’이 말을 걸어올 때면, 난 그 ‘우연’이 궁금하다. ‘우연’을 지딱지딱 내 삶에 편입시키곤 한다. 1도 상관이 없던 것들이 내 삶에 들어오는 순간 이내 의미 있는 일이 된다. 의미 있는 일이 되니 열심을 내게 된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결과들을 만난다. 


물론 그 결과들이 늘 긍정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나를 이전의 나와 다른 사람으로 가꿔주었다. ‘우연’은 내게 기회가 되었고 계획이 되었다. 내일도 아마 내게 찾아올 테지? 늘 그랬듯이 나는 그 우연에 지딱지딱 반응하겠지? 일정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나게 될 또 다른 내가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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