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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Oct 22. 2021

저녁 6시, 무야호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있고상황에 맞게 꺼내 쓴다.”  - 칼 구스타프 융



 “대 大사랑받아라!”

 “인생은 한번, 내 노래는 두 번 들어라!”


둘째 이모 김다비가 작년 5월 1일 근로자의 날에 ‘주라주라’로 데뷔했다. 넉살 좋은 김다비는 개그우먼 김신영의 새로운 ‘자아’로 트로트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녀는 1990년대식 올림머리, 반테 안경에 골프웨어를 입고 전국을 누비고 있다. 국민 MC 유재석은 유산슬이라는 캐릭터로 '합정역 5번 출구'와 '사랑의 재개발'로 트로트 가수로 등장했다. 바야흐로 트로트 전성시대의 조류와 함께 기존의 캐릭터와는 다른 모습을 대중에게 선보였다. 더 나아가 그는 신인그룹 싹쓰리의 유두래곤으로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이모 김다비, 유산슬, 유두래곤은 멀티 페르소나의 전형이다. 생각해보면 내 주변에도 이들처럼 ‘부캐’를 가지고 있는 지인들이 많다. 주중에는 건설회사 임원으로, 주말에는 협동조합 책방 대표로 활동하는 지인이 있다. 최근에는 일반 회사원이면서 음원을 발매한 지인도 있다. 평상시에는 가정주부로, 강의 의뢰가 들어오면 부모교육 강사로 활약하는 내 아내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양한 ‘부캐’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나는 대학입시에서는 냉정하고 다소 엄혹한 입학사정관으로, 소소한 일상을 진국스러운 마음으로 그려내는 작가로, 맡은 배역을 통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살아보는 아마추어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나도 이미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저녁 6시를 알리는 ‘땡’ 알람 소리와 함께 본업인 입학사정관은 퇴근한다. 퇴근과 동시에 작가와 배우의 삶이 시작된다. 내 삶의 ‘인싸’가 된다. 저녁 6시. 내 정체성의 모드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본업이 내게 유무형(有無形)으로 부여한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 다채로운 멀티 자아로 채워지는 시간.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요즘이다.


세컨드 라이프. 다양한 SNS 시대에 나를 포함해 현대인들은 이미 이 다채롭고 유쾌한 삶을 즐기고 있다. 우리는 여러 개의 ‘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상황에 맞게 ‘나’를 꺼내 쓰고 있다. 이전처럼 공간과 시간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 온라인상에서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저마다 그 놓인 상황과 맥락을 즐기고 있다.


‘지금과는 다른 삶’, ‘한 번쯤 살아보고 싶었던 삶’을 살아가기에 세상은 이미 최적화되어있다. 생계를 위한 경제적 활동과 더불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나다움’의 추구가 좀 더 용이해졌다.




나는 일과 시간에는 입학사정관으로, 퇴근 후와 주말에는 글 쓰는 일과 배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중생활을 해온 지 벌써 6년째다. 물론 ‘본캐’인 현실적 자아와 ‘부캐’인 이상적 자아가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다. ‘본캐’와 ‘부캐’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상호보완의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본캐’의 약비나는 삶을 ‘부캐’가 위로해 주고, ‘부캐’의 설렘과 열정이 ‘본캐’에게 활력을 붕붕 불어넣어 준다. 


결과에 상관없이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지 않고, 나를 나답게 만들어가는 데 ‘부캐’는 일등공신이다. 글쓰기를 통해, 무대를 통해, 어줍은 나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진짜 나를 만난다.


저녁 6시. 오늘도 나는 하나의 페르소나에 갇혀 숨 막히는 삶을 ‘존버’하기보다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소확행’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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