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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Oct 22. 2021

'나'에게로 가는 길


걷기에 좋지 않은 길은 없지!” 



시원한 바람 한 점이 아쉬운 여름 저녁. 이른 저녁을 먹고, 불어오는 바람을 가로막고 선 아파트 단지 사이 산책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책로 옆으로 도농천이 하나 흐르는데, 이 개천을 옆에 끼고 걸으면 바람을 만난다. 산책로 초입인데도 바람이 달다. 공기도 달다. 사각사각 바람소리에 어느새 몸도 마음도 시원하다.   


머리 위에는 반짝반짝 별이 빛나고, 발아래에는 정감 넘치는 이야기와 음악이 흐른다. 산책로 옆, 풀과 꽃이 올망졸망 모여 앉아 저마다의 이야기로 옥시글옥시글하다. 풀숲 사이사이 귀뚜라미는 “찌르르 찌르르”, 나무 위 매미는 “매앰 매앰 매앰”, 개울가 개구리는 “개굴개굴” 한데 어울려 한여름 밤의 오케스트라 합주가 된다. 쉴 새 없는 이야기와 합주에 눈도, 귀도, 다리도 즐겁게 걸을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이 어언지간(於焉之間) 새로운 환희로 고즈넉하다.     


산책로를 걷다 보면 평소보다 조금 빨라지는 심장 박동 소리와 두 다리 근육에서 전달되는 기분 좋은 뻐근함과 나른함을 맛본다.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온 몸의 세포가 살아있음도 확인한다. 끊임없이 떠도는 근심 걱정은 달빛에 맡긴 채 한가로이 걷다 보면 새삼 머릿속도 맑아진다.     




걷기는 남녀노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유산소 운동이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특별한 준비 없이 할 수 있다. 단순하고, 특별한 준비는 필요 없지만 마음먹기는 여간 쉽지 않다. 걷기 관련 숱한 예찬, 명언, 의약서, 일상의 간증들에도 불구하고 나도 바쁜 일상에 치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최소한 박물관에서 한 사수를 만나기 전까지.   


박물관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할 때다. 당시 ‘중국 소수민족의 혼례’를 주제로 중국 출장을 자주 다녔다. 출장에 동행했던 사수는 어지간해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았다. 조사지 이곳저곳을 하루에도 몇 시간씩 걸어 다녔다. 할 일없이-당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하루 몇 시간씩 걷는 건 정말 곤욕이었다. ‘출장비가 없는 것도 아니고, 택시 좀 타고 다니면 안 되나?’ 볼멘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꾹 삼켰다.      


하루는 두세 시간의 비포장도로를 걸어 이동을 해야 했다. 오늘은 교통수단으로 이동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불만을 억지로 숨기고, 사수에게 은근슬쩍 운을 띄었다.     


 “길이 험해서 걷기에 별로일 거 같아요!”     

 “걷기에 좋지 않은 길은 없지!”      


사수는 툭 던지듯 말하고는 신발 끈을 질끈 매고는 먼저 길을 나섰다. 별 수 없이 그날도 걸어서 이동했다. 이동 중, 사수는 걷기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라는 매우 상투적인 말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뿐이다.          




사수가 개인 사정으로 먼저 귀국하고 혼자 남아 필드조사를 진행했다. ‘걷기 전도사’인 사수가 없으니 드디어 내 마음껏 택시나 버스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게 됐다. ‘아, 그런데 웬걸!’ 습관이 무섭다고 걸어서 조사지로 이동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 사실을 자각한 순간, 당혹스러움과 불쾌감이 감돌았다.    


그렇게 걷기를 싫어하던 내가 아닌가! 황급히 택시라도 잡아볼 양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좁은 골목길이라 택시가 잡힐 리 만무했다. 별수 없이 두 발을 앞으로 옮길 수밖에. 그렇게 뚜벅뚜벅 두 발로 하루 종일 걸어 다녔다.      


눈앞에 펼쳐진 지역색이 물씬 묻어나는 시장, 간란식(干欄式) 다층집*과 이국적인 풍경, 따이족(傣族)*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향신료 특유의 냄새 등에 그만 매료되어 마냥 걷고 또 걸었다. 구름이 바람의 유혹을 못 이기고 세상을 떠돌 듯, 나도 걷기의 미학에 흠뻑 빠져 조사지를 거닐었다. 현장조사를 마무리하고 책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느릿느릿 걸었던 그 시간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음을 몸소 깨달았다. 사수가 말한 걷기의 미학은 아마도 이 쓰임을 두고 말한 게 아닌가 싶다.          




걷기는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삶의 지경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게다가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도 허락한다. 산책로를 거닐며 만나는 풀과 꽃, 별과 달, 사람과 사람에 조응하며 나는 내 삶을 곱씹고 복기한다. 그럴 때면 나는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된다.      


걷기를 통해 간혹 ‘행복’이라는 뜻밖의 선물을 받는다.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 예찬>에서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라고 말한다. 걷기와 함께 수반되는 고독과 고통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행복과 가슴 벅참을 선사한다. 속도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나는 걷기를 통해 나의 존재 이유를, 살아 있음을, 행복을 느낀다.  




맑은 날, 맑다가 흐린 날, 흐린 날, 구름이 많은 날, 더운 날, 시원한 날, 바람 부는 날, 샛바람 부는 날, 비 오는 날, 소낙비 오는 날, 비 오다 갠 날, 눈 오는 날, 찌물쿤 날, 맵찬 날, 다사한 날, 궂은날, 훗훗한 날, 상크름한 날. 시시각각 마주하는 산책로의 느낌이 다르다. 그 어느 순간도 마뜩하지 않은 적이 없다.   


새로운 길을 걷는다는 건, 아마도 설렘과 기대감을 만나는 것일 터. 길을 걸으며 어제보다 조금 더 큰 나를 만난다. 그 길에서 배우는 것이 많다. 가보지 못한 길은 설렘이면서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지기 전에 다시 길을 나설 수 있으면 좋겠다. 일부러 찾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나를 기대한다.



* 간란식(干欄式) 다층집 : 따이족의 전통적인 주택. 대나무와 목재를 재료로 만듦. 벽은 대나무를 쪼개어 엮고 지붕은 짚을 얹는다. 위층에는 사람이 살고 아래층에는 가축을 기르거나 또는 물건을 둔다. 아열대 기후에 매우 적합한 건축 양식이다.   


* 따이족(傣族) :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대부분 윈난성(云南省)에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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