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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Oct 22. 2021

그날 오후 지룡을 만났다


"엄마, 소금!"



요 며칠,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장대비가 쏟아진다. 그 덕분에 주말 내내 집에서 뒹굴고 뒹굴었다. 평상시에는 출근하자마자 퇴근해 한유(閑遊)롭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인데, 주말에 집에서 할 일없이 뒹구는 건 여간 속상하지 않다. 쉼 없이 비가 내리는 주말은 더 참을 수 없다. 날씨가 괜찮으면 야외로 나들이도 가고, 돗자리에 앉아 책도 읽고, 여름 햇살에 꾸벅꾸벅 졸기도 할 텐데. 아쉬움에 더해 눅눅함과 축축함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산책을 나섰다.   


비구름이 이유 없이 하늘을 가리고 서 있는 오후. 잠시 머물던 비바람이 울울(鬱鬱)한 내 마음을 말없이 읽는다. 시원하다. 그 시원함에 힘입어 산책로 여기저기 물웅덩이 안으로 일부러 철퍼덕철퍼덕 뛰어든다. 사방으로 물탕이 튄다. 유년시절 개구쟁이가 옴직옴직 들썩거린다. 장대비는 더 이상 불편한 대상이 아니다. 동무가 되어 산책로를 함께 동행한다. 




산책로 여기저기 나뭇가지, 아니 지렁이들이 꿈틀거리며 기어 다닌다. 나처럼 비 때문에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땅 속을 박차고 올라왔나 보다. 어림잡아도 30cm는 충분히 될 듯싶은 것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다. 지렁이는 온몸을 땅에 붙이고 배밀이로 땅바닥을 기어 다닌다. 몸의 마디를 유연하게 늘렸다가 단단하게 압축하고 다시 늘리고, 압축하기를 반복하며 땅바닥을 스치며 지나간다.


‘엄마, 소금!’ 유년시절 장난꾸러기의 외침에 나는 지레 놀랐다. 한동안 우두망찰 서 있다.


‘소금을 뿌리면 지렁이가 죽는다’는 얘길 어디서 들었는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왕소금을 들고 집을 나서던 어린 나만 떠오른다. 나는 “지렁이 퇴치!” 구호를 외치며 결연한 의지와 비장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지렁이를 발견하는 즉시 짜디짠 왕소금을 지렁이 위에 흩쳤다. 꿈틀거리며 소용돌이치는 지렁이를 보며 “휴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렁이는 삼투압에 의해 이내 단단하게 경직되며 생을 마감했다. 발그스름한 뺨 위로 흐르는 빗물을 연신 닦아내며 나는 다음, 다음 지렁이에게 돌진했다. 앞을 내다보는 눈도 없고, 온몸이 땅에 붙어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지렁이와의 싸움은 늘 백전백승이었다.  


“지렁이가 다 자라면 저 병 안에 든 뱀처럼 된단다.” 유년시절, 할아버지가 하신 이 우스갯소리를 나는 진심으로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 거실에 뱀이 담긴 술병이 하나 있었다. 으스름 황혼 녘, 독기 품은 뱀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할아버지는 뱀술을 약용으로 한두 잔씩 드셨는데, 뱀술을 드신 날에는 뜨악하여 곁에 얼씬도 안 했다. 똬리를 틀고 독기를 머금은 뱀도 무거웠지만 그 술 냄새가 꽤나 고약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야 지렁이가 자라 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비 오는 날 소금을 찾을 이유가 사라졌다. 천적인 어린 나를 만나 피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죽음을 당하는 지렁이가 생태계에서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지렁이가 배설한 흙을 분변토라고 하는데, 이 분변토는 가장 깨끗하고 안전한 퇴비가 된다. 지렁이는 농경민족의 풍년을 기원하는 다산제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가축의 하나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지구 상에 있는 대부분의 땅의 체력을 책임지고 있다. 또한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녹색 청소부도 자처하고 있다.


지렁이를 한자로 지룡(地龍), 토룡(土龍)이라고 하는 이유가 충분하다. 그에 견주어보면 나는 그렇게 대단치도 못하다.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나 지렁이보다 쓰임이 있거나 위대하지도 못하다.


비 오는 오후, 걷기에 조금은 불편한 질퍽한 길에서 지렁이를 만났다.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그 츱츱한 시간을 마주한다. 나로 인해 상처 받고 으스러진 생명은 없는지 발을 조심히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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