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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Oct 22. 2021

짱돌, 나만의 손난로


엄마핫팩!”

 


아침 등굣길, 집을 나서며 아들이 핫팩을 찾는다. 아들 녀석의 핫팩 타령에 겨울이 다가왔음을 뒤늦게 알아챈다. 여느 가정처럼 우리 집도 손난로가 겨울 필수 아이템이 된 지 오래다. 아내는 손난로 하나를 꺼내 이리저리 흔들며 아들 녀석에게 건넸다. 아들은 손난로를 받아 들고 이내 현관문을 나섰다.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손난로의 따뜻한 온기가 아이를 따뜻하게 보호해주길 기도한다. 아마도 매 겨울, 엄마가 손수 뜨개질해 주셨던 벙어리장갑에도 이런 기도가 담겨 있었겠지. 




성남시 신흥동.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동네다. 1960년대 서울 무허가 판자촌 철거민 이주 목적으로 만들어진 동네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온 동네가 벽돌집을 올리느라 공사가 한창이었다. 동네 군데군데 판자촌을 허물고 벽돌집이 들어섰다. 공사는 봄부터 겨울까지 계속됐고 몇 달 사이에 근사한 벽돌집이 하나 둘 늘어났다. 


공사장에서 사용되는 건축자재는 훌륭한 놀이도구였다. 공사장에 나뒹구는 돌멩이는 비석 치기와 사방치기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폐목재는 자치기와 썰매를 만드는데 최고의 재료였다. 나는 겨울이 오면 공사장에 나뒹구는 폐목재를 모아 썰매를 만들었다. 그리고 매일 밤 기도했다. ‘오늘 밤에 눈이 펑펑 와서 비탈길에 수북이 쌓이길’ 


이 기도는 신기하게도 효험이 있었다. 기도를 한 다음날엔 어김없이 눈이 왔고 비탈길에 수북이 쌓였다. 아마도 어린아이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이 저버릴 수 없었으리. 들뜬 마음에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썰매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엄마가 졸린 눈 비벼가며 털실로 짜주신 벙어리장갑을 끼고. 


비탈길은 이미 썰매를 타고 있는 친구들로 한 가득이다. 서로 자신이 만든 썰매를 뽐내며 셀 수도 없이 비탈길을 오르내린다. 썰매를 타는 재미의 압권은 비탈길 중간의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타가닥타가닥’ 경쾌한 소리가 엉덩이를 거쳐 전신에 퍼졌다.


계단을 타고 내려갈 때는 노련한 기술이 필요하다. 무게 중심을 뒤로하고 썰매를 적당히 잡아가면서 내려가야 한다. 그렇다고 속도를 너무 늦추면 계단 중간쯤에 멈출 수 있어 적당한 브레이크 조절이 필요하다. 때때로 중심을 못 잡아 엎어지기도 했지만 그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추운 날씨에 시린 손을 연신 ‘호호’ 불어가면서.




처음엔 벙어리장갑을 끼고 있어서 손이 눈곱만큼도 안 시렸다. 하지만 점심때쯤 되면 털실 사이사이로 눈이 뭉쳐져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 뭉쳐진 눈 알갱이들의 냉기가 고스란히 손끝을 타고 온몸을 시렸다. 이쯤 되면 우린 너나없이 큰 드럼통의 장작불이 기다리고 있는 공사판으로 갔다. 우린 공사장 인부들이 잠깐이나마 몸을 녹이려고 피워 논 장작불 주위로 빙 둘러서서 언 몸을 녹였다. 실팍한 장작불의 온기에 얼어붙은 털실 벙어리장갑에서 이내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언 몸이 어느 정도 녹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누가 더 오래 입김을 뿜나’ 내기가 시작됐다. ‘하~~~’, ‘호~~~’ 소리로 온 겨울이 가득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입을 크게 벌려 ‘하~~~’하고 내뿜으면 하얗고 하얀 입김이 찬 하늘을 가득 메웠다. 이 별것 아닌 내기에 까르르까르르 얼마나 웃었던지. 좁은 골목이 한바탕 시끌벅적했다.




그렇게 시시한 것들로 한바탕 웃고 떠들고 나면 공사장 한쪽에 쌓여있는 짱돌을 주워 장작불에 데웠다. 이때 아무 짱돌이나 주워서 넣으면 안 됐다. 까다로운 선별 절차가 필요했다. 짱돌은 표면이 비교적 매끈하고 한 손에 다 쥐어질 만한 크기가 좋다. 너무 크면 한 손에 다 쥐기가 어렵고, 너무 작으면 금방 온기가 사라져 아쉬움이 컸다. 그래서 한 손에 다 쥐어질 만한 크기의 짱돌을 골라 데웠다.


데우는데도 노하우가 필요하다. 덜 달궈지면 미지근하고, 너무 과하게 달궈지면 화상을 입을 수 있었다. 경험상 10분 정도 달구는 게 가장 적당하다. 이 정도면 3~4시간 정도는 따뜻하게 온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공사장 인부들에게 짱돌을 가지고 가는 걸 들키면 안 됐다. ‘불만 살짝 째고 갈게요’라는 곰살스러우면서도 유들유들한 표정은 필수였다.


그렇게 달궈진 짱돌을 주머니에 넣고 손에 쥐고 다니면 겨울의 매서운 추위는 이미 접수가 끝났다. 뭐가 그렇게 의기양양했는지. 손에 쥐어질 만한 크기의 짱돌의 온기에 승전보를 울리며 돌아오는 장수가 된 듯했다. 




최근 성남 구도심 도시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벽돌집들로 빼곡한 동네가 재개발 예정지로 지정됐다. 재개발이 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 그 비탈길도, 썰매도, 짱돌도 사라질 테지.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옛 동네를 한번 둘러보러 가야겠다. 그 겨울, 사륵사륵 눈이 내리길 기도했던 비탈길을 휘뚜루마뚜루 돌아다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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