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감자가 싸길래 좀 사 왔네!”
토요일 아침, 부스럭 소리에 얼핏 잠에서 깼다. 쉽게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겨우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찾았다. 몇 시쯤 됐나 보니 여섯 시도 채 안됐다. 몸도 영 찌뿌둥한 것이 오전 늦게까지 이불속에서 뭉개고 있으려고 했는데. 살짝 억울하다는 생각에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의 출처를 찾기 시작했다. 부엌이다. ‘이 꼭두새벽부터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할까?’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 방문 틈 사이를 넘어 달겨드는 치명적인 냄새에 반사적으로 일어나 앉았다.
감자 삶는 냄새다. 어제저녁 장모님이 “햇감자가 싸길래 좀 사 왔네!”하며 감자 한 박스를 사 가지고 오셨는데 그걸 삶는 모양이다. 아파트 단지 앞에서 한 박스에 만원도 채 안 되는 가격에 팔더란다. 햇감자에 가격도 싸니 평상시 손이 크신 장모님이 어찌 그냥 지나치셨을까 싶다. 가족을 풍족하게 먹이겠다는 생각도 한몫했으리라.
무더운 날씨에 늙수그레한 장모님이 감자 한 박스를 들고 오시느라 옷이 땀으로 범벅이다. 장모님의 수고로움에 대한 감사와 함께 ‘저걸 누가 다 먹는다고 힘들게 사 오셨을까?’하는 속마음을 숨기며 냉큼 수건을 건넸다. 장모님의 넉넉한 마음에 대한 감사보다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질 확률이 농후한 감자를 걱정하며 어제 잠자리에 들었던 참이다.
감자 삶는 냄새에 이끌려 어느새 가스레인지 앞이다. 냄비에는 포슬포슬 분이 뽀얗게 핀 먹음직스러운 삶은 감자가 한가득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곱만치도 없던 허기짐에 이끌려 냄비 뚜껑을 열어 실팍한 감자 한 알을 집어 들었다. ‘호호’ 불며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무니 소금기 머금은 감자가 짭조름하다.
‘아, 설탕!’ 설탕에 찍어먹으면 제격이겠다는 생각에 부엌을 뒤졌다. 5분여간의 ‘혈투’ 끝에 설탕 발견! ‘아싸~~~’ 설탕을 찍어 감자를 한입 먹으니 달달하고 짭조름한 게 바로 이 맛이다. ‘바로 이 맛’에 이끌려 감자 한 알을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사라진 감자 한 알 뒤로 치명적인 그리움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이맘때가 여름감자 수확 철이다. 여름감자는 1년 중 해가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 무렵에 캔다고 하여 ‘하지감자’라고도 불린다. 어린 시절 감자 수확 철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 많을 때는 다섯 번을 감자붕생이(감자범벅)*로 끼니를 때웠다. 여섯 식구 때꺼리를 해결하기 위함과 싼 값에 엄마는 저녁상에 감자붕생이를 주구장창 올렸다.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생활이 궁핍하지는 않았지만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던 우리 3남매와 할아버지를 부양하기에 부모님의 수입은 늘 빠듯했던 거 같다. 엄마는 온종일 그 입치다꺼리 하기에도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동무들과 하루 종일 뛰어놀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집에 돌아오면 풍로에서 달달한 감자 삶는 냄새가 났다. 그날 저녁은 십중팔구 감자붕생이다. 감자붕생이는 엄마가 가장 잘하는 음식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가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줄곧 해주셨던 음식이었단다.
감자붕생이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감자는 껍질을 벗기고 삶는다. 이때 굵은소금을 흩뿌려주는데, 감자 고유의 풍미를 높이기 위해서다. 감자가 다 익었는지 간 별 하는 방법도 심플하다. 젓가락으로 감자 한두 알정도 찔러보면 된다. 감자가 어느 정도 익으면 물을 따라내고 뜸을 들이면 된다.
뜸을 들이는 동안 감자를 삶고 따라두었던 끓는 물과 뉴슈가*를 밀가루에 붓고 반죽을 한다. 밀가루 익반죽은 내 몫이었다. 특별한 기술 없이 말랑말랑하게 뭉쳐주면 되었는데 그게 은근히 재미있었다. 반죽은 뜸 들이는 감자 위에 뜯어서 얹어 준 다음 뚜껑을 덮어 익혀주면 끝이다.
짭조름한 감자를 한 입 먹고 뉴슈가로 달련된 달짝지근한 밀가루 떡(수제비)을 한 입 먹으면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맛난 감자붕생이도 하나 아쉬운 점이 있었다. 쉽게 목이 막힌다는 거였다. 감자 한 입, 밀가루 수제비 한 입, 물 한 모금이 필수였다.
그래서였을까? 감자붕생이를 먹은 날은 금세 포만감이 들었다.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른 건지 물을 계속 마셔서 배가 부른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금세 배가 불렀다. 그리고 이 포만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키가 크느라 먹성이 왕성했던 나이기도 했고 그 단짠단짠의 황홀한 조합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어 저녁 내내 부엌을 들락날락했다. 거의 매일 먹으니 지겨울 법도 한데 뭐가 그렇게 맛있었는지. 내 손으로 직접 오밀조밀 뽐낸 솜씨를 맛보는 재미와 동생들과 이런저런 밀린 이야기를 두런두런하는 재미가 더해져 그러했으리.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옥시글옥시글 저녁을 먹던 그 시절보다 풍요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맘때 엄마가 해주셨던 단짠단짠의 감자붕생이, 그 치명적인 맛이 문득 그립다.
* 감자붕생이 :감자의 반을 갈아 거른 건더기와 가라앉은 앙금, 감자 전분, 소금을 섞고 치대어 반죽하여 소금 간한 풋강낭콩과 섞은 다음, 솥에 나머지 감자를 껍질 벗겨 깔고 적당한 크기로 떼어 낸 반죽을 감자 위에 얹어 푹 쪄서 감자가 익으면 주걱으로 잘 섞은 것이다. 강원도 영월 지방에서는 찐 감자를 밀가루와 섞어 반죽하여 들기름, 소금, 설탕 등을 넣어 찐 뒤 호박잎에 싸서 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감자범벅이라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 뉴슈가 : 포도당 분말에 사카린나트륨을 섞어 만든 설탕 대체 감미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