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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Nov 24. 2021

기다릴 수 없으면 사랑할 수 없다


살다 보면 무턱대고 다가가기보다 관심과 무관심 사이 그 어디쯤에서 인내심을 갖고 누군가를 잠잠히 기다려줘야 하는 순간이 있다.” - 이기주마음의 주인 에서



나는 순혈 ENFP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심히 직관적이고, 다분히 감정적이다. 현실의 문제에 집중하고 그다음 순간을 기대하고 꿈꾼다. 장기적인 세계보다는 단기적인 세계에 집중한다. ‘카르페 디엠’은 내 인생 항로의 부표다. ‘If it is not fun, why do it’, 이 문장을 만났을 때의 전율과 떨림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여기’, ‘지금’은 ‘미래라는 결실의 과정이다’는 인생관을 가지고 ‘현재에 흩뿌려진 조각들을 미래의 퍼즐에 채워 넣는 걸’ 즐긴다. 내 행동에 명확한 확신은 없지만 현재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또한 믿는다. 


이런 성격 유형인 나와 나를 둘러싼 관계, 특히 딸내미와 아들내미에 대한 내 생각은 한결같다. 딸내미는 게으르고 완벽주의자다. 아들내미는 고지식하고 FM이다. 직관적이고 즉흥적이며 자유분방한 ENFP 성향인 내게 딸내미와 아들내미는 늘 '제한과 타협'의 대상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적 태도를 갖는 것이 양육의 시작이라고 하는데, 참 어렵다.




딸내미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보기에 소질도 충분하다. 매번 잘 그렸는데도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완벽하게 그려질 때까지 그림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매번 그림 보여주기를 시뜻해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몰래몰래 훔쳐볼 수밖에 없다. 


완벽주의 때문에 딸은 걱정과 부담감에 그림 그리기를 주저주저한다. 그리고는 이내 게으름을 피운다. 지금 시작하고 나중에 완벽해지면 되는데, 매번 아쉬움이 하늘하늘 피어오르는 것 같다. '잰 놈 뜬 놈만 못하다'라고 일은 빨리 마구 하는 것보다 천천히 성실하게 하는 것이 더 낫다마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아들내미는 무엇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논리적으로 설득이 돼야 행동으로 옮긴다. 자신만의 생각이 뚜렷하고 원칙을 고집한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행동하면 좋겠는데 원리원칙에 살고 원리원칙에 죽는다. 


남 하는 대로 따라가면 되는데 중뿔나게 혼자 고집을 부린다. 딱 맞고 벗어남이 없어야 한다. 이런 아들 녀석한테 나는 종종 종주먹을 들이대지만 소용없다. 아들의 이 같은 진국스러움은 AM인 내가 넘기 힘든 산이다.   




밤 9시 50분. 미술학원 수업을 마치고 내려온 딸을 픽업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딸내미가 입시미술 준비 등의 고충을 털어놓는다. “나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애들이 너무 많아!” “그림을 여전히 못 그리는 거 같아!”, “학교 수행 준비도 해야 되는데, 망했어!” 


딸의 하소연이 끝나기도 전에 “라떼는 말이야~~~”를 연발하고 있는 나를 마주한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되던 승자의 떨림이 가득한 선배들의 충고가 달갑지 않았던 나였는데, 이렇게 열변을 토하고 있다. 딸아이의 푸념을 그냥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면 그뿐인데. 희떱게 씨불이며 우쭐대는 내 목소리가 차 안 가득이다. 뒤이어 불편한 침묵의 시간.




긴 침묵 때문이었을까? 얼마 전 읽었던 이기주 작가의 ‘마음의 주인’의 한 문장이 불현듯 솟구쳐 오른다. “살다 보면 무턱대고 다가가기보다 관심과 무관심 사이 그 어디쯤에서 인내심을 갖고 누군가를 잠잠히 기다려줘야 하는 순간이 있다.”  


‘아차차!’ 오늘도 때늦은 후회를 한다. 후회와 함께 아이들의 모습 속에 숨어 있던 나를 마주한다. 내 아이들 속에 숨어 있는 나를 들여다본다. ‘아이들은 그냥 아이일 뿐인데, 내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아차릴 수 있는 일인데 손쉽게 아이들을 탓하지는 않았는지?’, ‘아이들은 그대로 완전체인데, 나처럼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갖고 있을 뿐인데, 내가 부정하는 것들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기다릴 수 없으면 온전히 사랑할 수도 없을 텐데... 룸미러 너머 딸아이의 시무룩한 표정에 코끝이 알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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