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작가님! 브런치를 통하여 작가님께 새로운 제안이 도착하였습니다.”
가을이 하릴없이 깊어가고 마음은 흘근흘근 바람에 떨구는 토요일 오전. 브런치에서 메일이 한통 도착했다. ‘뭐지?’ 기대 반 궁금증 반 메일을 열어보니, 브런치를 통해 글을 매개로 소통하고 있는 작가 한 명이 보낸 메일이었다. 메일 내용은 브런치의 글을 모아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이었다. 책 제목은 “살아보니, 대만”이었다. “대만”이라는 공통분모로 종종 소통했던 터라 나는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지난주에 작가로부터 책을 선물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궁금했는데, 바로 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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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누구에게나 녹록하지 않고, 때론 숨만 쉬고 살아가도 짐이 된다. 낯선 곳에서는 그나마 숨도 잘 안 쉬어진다. 덥고 습한 날씨에 침대가 위아래로 들썩이며 몸을 흔들어대는 6.8 규모의 지진이나, 간판을 종잇장처럼 날려버리는 태풍도 겪었다. 두려웠다. 자연환경의 차이가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미처 몰랐던 스스로를 탓하는 수밖에 없었다.”
책 머리말의 이 한 문단만으로도 작가가 보낸 대만에서의 4년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짐작을 넘어 십분 공감이 됐다. 나도 어학연수로, 석사과정을 밟기 위해 대만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 있다 보니 이 문단의 깊이가, 삶의 처절함이 어떤 것이었을지 이해하고도 남았다.
같은 경험을 했다는 것은 소통의 다름 아니다. 물론 공통의 경험이 공감의 전제 조건은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대만에서 일정기간 이상 체류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몇 문장이 갖는 삶의 밀도를 충분히 공감하리라 믿는다.
내가 살았던 대만(1999년~2000년, 2002년~2004년)과 저자가 살았던 대만(2015년~2019년)은 바뀐 게 많지 않았다. 나는 타이베이台北에서, 저자는 까오시옹高雄에서 생활했지만 대만은 그대로였다. 다행이었다.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안심시킨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시간이 거꾸로 간다. 시간의 역순으로 장면 장면이 떠오른다. 초점이 맞지 않은 예류野柳* 사진 속에, 눈을 감아버린 국립고궁박물원国立故宫博物院 사진 속에, 그 시간들이 붙박여 있다.
1999년 4월의 어느 날 오후 타오위안桃园 국제공항의 덥고 습한 향신료 특유의 비릿한 냄새를 시작으로 나의 대만 생활이 시작됐다. 땅 설고, 물 설은 전혀 낯선 땅에서 달달하고 쫄깃쫄깃한 식감의 전주나이차珍珠奶茶 한 모금은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곤 했다.
노포老鋪로 가득한 스린야시장士林夜市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을 거 같았고, 921대지진九二一大地震(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도 묘사되었던)에 황망한 마음도 잠시, 부리나케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던 순간, 타이베이 근교의 우라이乌来 온천을 갔다 오는 길에 마주했던 성난 표범처럼 휘몰아치던 폭풍우가 내 눈앞에 펼쳐진다.
누구에게라도 그렇듯 진심이었던 시절 왓슨스屈臣氏* 앞에서 여자 친구를 기다리던 나를, 세븐일레븐7-Eleven便利店의 영수증 복권을 목숨 걸고 사수하던 나를, 욕실 벽에 매달려 나를 지켜보고 있던 벽호壁虎*에 기겁하던 나를, 한 겨울 전기장판이 없어 헤어드라이어로 이불속을 데우던 나를,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멜로디가 들리면 만사 제쳐놓고 쓰레기를 담은 봉투를 들고나가던 나를 만난다.
두리안榴莲* 맛에 매료되어 두리안을 냉동실 그득 채우던 나를, 점심시간이면 학교 앞 排骨大王식당에서 갈비덮밥排骨饭과 가정에서 직접 만든 도시락便当을 사 먹으며 허기를 달래던 나를, 저녁시간에 사대로师大路*의 태국쌀국수집에서 70台币*(한화 2,500원 정도)의 팟타이를 먹으며 아내와 데이트하던 나를, 새해 타이베이 101台北国际金融中心*의 불꽃을 보며 아내와의 사랑이 영원하길 두 손 모아 기도하던 젊은 시절의 나를, 첫 아이를 유산하고 아내 몰래 밤새 눈물 흘렸던 나를 만난다.
대단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그 기억들이, 순간들이 이토록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니. 어쩌면 대만이, 그것들이, 그 순간들이 내 삶에서 진짜 대단한 일들이 아니었을까? 시끄러웠던, 사람 냄새가 가득했던, 노포老鋪들이 즐비했던 거리거리가, 아내와 함께했던 시간 시간이 오롯이 내 앞에 펼쳐진다. 대만이 펼쳐진다.
“살아보니 대만”을 “읽다 보니 대만”이다. 하나도 진심이 아닌 적이 없던 젊은 시절의 나를 만난다. 그리고 중년의 나에게 안부를 묻는다. 오늘은 왠지 시끄러웠던 일들을 쏟아내도 될 것만 같다. 그래도 될 거 같다.
* 예류野柳 : 대만 북부 해안에 위치한 관광지. 예류지질공원은 침상과 풍화 작용을 거쳐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암들이 늘어서 있다. 대표적인 바위는 ‘여왕 머리 바위’이다.
* 왓슨스屈臣氏 : Watsons. 홍콩에 본사를 둔 drug store 체인
* 벽호壁虎 : 도마뱀붙이. 뱀목 도마뱀붙이과의 동물
* 두리안榴莲 : 천국의 맛과 지옥의 냄새를 모두 가지고 있는 과일. 냄새만 맡으면 먹을 수 없을 것 같지만 달콤한 맛이 매력적이다.
* 台币 : 대만의 화폐
* 사대师大 : 국립대만사범대학교國立臺灣師範大學의 약자
* 타이베이 101台北国际金融中心 : 타이베이 월드 파이낸셜 센터. 101층으로 지은 대만의 대표적인 마천루
- 네이버 지식백과 등 참조
* 대만은 실내 난방시스템이 갖춰 있지 않아 영상 10도 안팎의 온도에도 매년 동사자가 나온다.
* 대만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쓰레기차가 온다. 이때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와 같은 클래식 음악을 울리며 나타난다. 종량제 쓰레기봉투는 따로 사용하지 않는다. 일반 봉투에 쓰레기를 담아 정해진 시간에 쓰레기차에 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