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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Mar 16. 2022

딸의 그림 나의 그림


미술학원은 6층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데스크에 앉아 있던 여성이 나를 힐끔 올려다본다.

“전화하셨던 분이시죠?, 혼자 오셨어요?”

“네, 저 혼잡니다.”

“아, 네. 이쪽에서 잠깐 기다리시겠어요. 상담 선생님 불러올게요.”  

    

얼마쯤 지났을까, 30대 중반의 남성과 함께 그 여성이 나타났다. 그 남성은 이 학원의 미술교사이면서 상담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는 데스크 옆의 빈 공간, 아마도 나처럼 상담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장소로 나를 안내했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보고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서먹서먹한 공기를 뚫고 그가 내게 질문을 던진다. 그의 낮고 평온한 톤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긴장감을 채근한다. 조금 전까지의 고자세는 온데간데없다.

“딸아이가 이번에 고2 올라가는데요, 그림 그리는데 관심이 있어서요. 개인적으로 봤을 때, 그림에 소질이 있는 거 같긴 한데, 제가 이쪽 분야는 잘 몰라서 여기저기 자료도 찾아보고 했는데, 본인은 일러스트 관련해서 관심이 있다고 하네요. 최근에 아이가 학원을 다녀보고 싶다고 해서요. 그림 몇 컷 가지고 왔는데 보고 말씀 좀 해주시겠어요.”     

‘어떻게 오셨어요?’ 한마디에 말을 주섬주섬 내셍기며 딸아이의 그림이 저장된 핸드폰을 내밀었다. 어젯밤에 자신의 실력에 확신이 없는 딸아이를 겨우겨우 설득해 그나마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하는 그림 몇 컷을 어렵사리 받아온 터였다. 그는 그림을 보는 둥 마는 둥하더니 이내 핸드폰을 돌려주며 하는 말이,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거 같네요.”     


이게 말이야, 방귀야? 당연히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니 여기까지 상담을 받으러 온 게 아닌가? 그림에 소질이 있다거나 잠재력이 보인다거나 등의 상투적이지만 긍정적인 피드백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림 하나하나를 꼼꼼히 보는 척이라도 해야 될 거 아닌가? 딸아이도 나도 어렵사리 그림을 내밀었는데. 순간 불쾌한 감정이 자글자글 내연한다.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낮고 단단한 톤의 목소리로 상담을 이어간다.

“내신 성적은 어떻게 되나요? 어떤 대학, 어떤 전공을 목표로 하고 계신가요? 입시미술은 실기능력과 내신, 모의고사 점수를 고려해서 준비하셔야 됩니다. 합격 가능성을 높이고 싶다면, 실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셔야 돼요. 지금부터 준비해도 가능하세요. 하고자 하는 의지와 끈기만 있으면 됩니다.”     


그의 말에 나는 십분 공감한다. 대학입시는 막연한 상상만으로는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 분명한 목표와 적확한 계획을 가지고 준비를 해도 늘 변수가 생긴다. 다른 누군가와의 경쟁도 불가피하다. 심지어 미술 실기는 거의 대부분의 대학에서 경쟁률이 어마어마하다. 우리 대학의 경우도 수시모집에서 미술 실기는 평균 40:1이 넘는다. 준비도, 진입도 쉽지 않다.           


사실 내가 궁금한 건 대학입시에서 아이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가 보다 미술 방면으로 가능성이 있는가이다. 내 관심은 아이가 어떻게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흥미와 재능을 확장시켜 줄 수 있을까 이다. 딸내미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할뿐더러 일정 수준의 성취 경험도 가지고 있다 보니 아이의 흥미를 재능으로 더 키워주고 싶은 바람이 크다. 딸은 진심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색감도 좋고 감각도 있다. 예술적 감수성을 강점으로 가지고 있다. 그 강점을 더 키워주고 싶은 마음에 이곳에 왔는데, 자신의 대학입시 지도 경험담과 함께 입시미술 준비과정에 대한 상담이 한참 동안 이어진다.     


상담이 이어지는 동안 가능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본다. 가능성은 앞으로 실현될 수 있는 정도를 말한다. 그 실현 가능성은 무엇보다 노력의 정도와 자기효능감에 기초한다. 물론 세상사가 이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개인의 노력과 할 수 있다는 자존감은 그 어떤 것 보다 우선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딸아이의 흥미와 재능을 실현 가능한 꿈으로 확장시켜주기 위해 미술학원 등록이 필요하다 여겼다. 물론 그것이 대학 진학으로 이어지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입시미술 준비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되니 적잖이 불쾌하다.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생각의 파편들이 불쑥 크게 다가온다.

        

나와 아내는 스무 살에 꼭 대학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인의 필요에 의해 시기는 언제든 상관없다. 안 가도 무방하다. 지난 18년 동안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아이를 키워왔다. 우리 부부의 교육관에 따라 아이는 그 흔한 보습학원 한번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아이는 학교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진 못한다. 괜찮다. 내신 성적이 우리 아이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니까. 스스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앞으로 어떤 분야의 일을 하고 싶은지 알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우리 부부의 교육관과는 상관없이 대학이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학 간판 없이 사회에 진출한다는 것은 여전히 불편하다. 불편함과 곱지 않은 시선을 감수하며 살아가야 한다. 물론 자신의 흥미와 재능을 더 확장하기 위해 대학 진학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대학 진학을 안 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결국 나도 별 수 없이 장삼이사張三李四일 뿐이다. 딸아이는 우리 부부가 그랬듯 힘겨운 입시의 터널을 지나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라는 두려운 정글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대학에 가야 하는지?’ ‘나는 누구이고, 앞으로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는지?’ 고민하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온 놈이 온 말을 하여도' 이 질문에 대한 진국스러운 고민이 먼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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