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포이 신전 앞에 서다

[22년 만에 대학원생]

by Bara belita

γνῶθι σεαυτόν

Know thyself, Know yourself

너 자신을 알라


과거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델포이에서는 신탁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델포이 신탁은 아폴론이 내리던 예언을 지칭하는데 그 난해함과 모호함은 매우 유명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알고 있는 ' 너 자신을 알라 '도 그리스 델피에 있는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경구였다. 오랜 시간이 켜켜이 쌓여 경이로운 흔적으로 남아있는 신전 앞에 서서 예언을 듣기 위해 긴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던 과거 사람이 되어본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마주한 첫 번째 과제는 입학원서 작성이었다. 대학마다 차이가 있지만 자기소개에서 시작하여 진학동기 및 목표, 미래의 연구계획 등의 학업계획을 작성해야 한다. 과거 사회생활에서 입사지원서를 쓰면서 다져진 실력이 발휘되어 주길 기대했지만 여전히 정확하게 정립되지 못한 나의 정체성 앞에 좌절하고 만다. 합리적 포장과 내면성찰에 의한 솔직함 사이에서 ' 나는 누구지?! ' , 그 질문을 던지고 던지고 던지지만 돌아오는 답은 메아리뿐 인 듯하다.


' 너 자신을 알라 '


델포이 신전 앞으로 소환당해 자신의 무지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 실현된다는 델포이의 예언을 듣고 학업계획서를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성균관대, 한양대, 경희대, 세 대학의 학업계획서를 쓰면서 고민하고 지각하고 발굴의 순환이 계속되었다. 자기소개서든 학업계획서든 그야말로 잘 작성하기 위해서는 관망이 필요하다. 우리는 써야 하는 글의 항목과 질문 하나하나에 처음부터 지나치게 집중할 때가 있다. 잘 쓰고 싶은 마음에 각 잡고 1번 항목부터 진지하게 읽고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간다. 물론 이 방법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 항목의 글을 써야 할 때에는 근접하고 좁은 시야보다는 한발 물러나서 형편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1번 항목에서는 무엇을 묻고 있고, 2번 항목에서는 무엇을 보고자 하며, 3번 항목에서는 어떤 미래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하는지 전체 항목의 구성을 파악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전체를 대강 살펴보는 작업을 2~3번 반복하면 지원서에 어떤 내용을 어떤 의미와 목적을 위해 배치해서 작성해야 하는지 발견하게 된다. 소재의 중복 작성도 방지하고 균형 있고 입체적인 글이 작성된다. 물론 방법을 알고 있어도 글은 산통을 통해 나오는 산출물이다. 특히 성균관대학교 학업계획서가 가장 어려웠는데 그 이유는 1번 항목에 있다.


1. 자신의 학문적 지향(Academic incl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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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지향이라니?! 일단 22년 만에 공부하겠다는 사람에게 '학문적'을 묻는 건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이제 배우겠다는 사람에게 어떤 분야의 지식을 배워왔는가를 묻다니, 게다가 '지향'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인 줄 처음 알았다. 나는 '학문적 지향'의 의미를 스스로 재정의하는데 꼬박 3일을 사용했다. 꽤 오랫동안 관심을 지속해 왔던 분야 그리고 앎을 추구했던 주제에 대한 성질을 파악하고 특징이 무엇인지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배움들의 교집합을 하나, 둘 찾아 나열하여 예상 궤적을 그려 방향성을 확인했다. " 서로 다른 정보를 관찰하고 그 안에서 관통하는 맥락과 개념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즐깁니다. " 그렇게 학문적 지향에 첫 문장을 쓸 수 있었다.


학업계획서 초안을 쓰고 몇 수십 번 생각하고 잘 어울리도록 다듬고 고치는 작업을 하면서 눈물겨운 시간이 고스란히 글에 담기게 되었다. 처음에 관망하며 계획했던대로 작성되었는지 확인 후 탈고하였다. 참 재미있는 건 초안을 쓰는 것보다 퇴고의 과정에서 더 꽤 괜찮은 글이 완성된다. 그리고 처음에는 무엇을 써야 할지 걱정되었지만 오히려 버려야 할 것들이 더 많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자기소개서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백 번을 썼지만 '자기'를 '소개'한다는 건 세상에 어려운 일중 하나인 것 같다. 자신감과 자괴감 사이를 누비고, 확신에 찬 의미가 부여된 경험을 나열하며, 글을 읽는 사람의 판단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그리고 글을 완성하고 난 후 발견하는 만족감은 보상과도 같다. 성균관대학교 학업계획서를 작성면서 그동안 몰랐던 나의 학문적 지향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내 안의 축적된 지식과 관념을 발굴하며 희열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패는 던져지고 면접의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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