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의 낭만
내게 남은 몇 컷의 낭만.
폭우가 쏟아지는 새벽, 홀로 불 밝힌 편의점.
파라솔 아래 넷이 다닥다닥 붙어 마시던 소주.
살짝 의자를 젖히고 고개들어 맞는 빗물의 감촉.
책과 영화와 음악 이야기를 했던가.
시드니에서 보낸 3개월.
어학원 수업이 끝나고 맥도널드에서 홀짝이던
인생 첫 블랙커피.
글을 쓰고 싶을 땐 쌈짓돈 털어
오페라하우스 앞 테라스 카페.
페리를 타고 맨리비치로 건너가 한참 바라보던
바다. 서퍼. 연인. 아이들.
배경 음악은 항상
스팅의 'Englishman in Noyork'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장만했던
비디오 CD 콤보 플레이어.
니콘 FM2와 로모 카메라.
서점과 제과점은 시급 2,500원,
세계맥주 전문점은 시급 3,000원.
그래도 고양이 사룟값이 나왔네.
동아리 방에서 끼적이던 가사와 미숙한 음악들.
마이크. 가요제. 언더그라운드 공연.
컴필레이션 앨범 참여. 전생 같은 기억.
최선을 다해 시간을 낭비하던 그때
내가 가장 예뻤는지도.
지금 머릿속에는 각종 청구서. 빽빽한 할 일 목록.
약 먹는 시간. 늘어나는 학원비.
INFP 어른이 돈을 모으려면 낭만은 버려야지. 친구의 말에. 하지만 쓸모가 있는걸. 무지개에 경이로움이라는 쓸모가 있듯이.
나는 결국 낭만적 할머니가 될 거야. 추억이 나를 먹여 살릴 거야.라고 답하는 마흔다섯.
다행이지.
비 온 뒤 진창 된 마음에 무지개를 띄우려면, 명랑한 기억이 필요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