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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ㅂ ㅏ ㄹ ㅐ ㅁ Nov 21. 2021

나는 지금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요_

그림책이라는 산 / 고정순






고정순 그림책 작가가 아파트 관리비를 벌기 위해 은평구 마을 주민들과 글과 그림을 그릴 적이다.


열다섯 명의 주부들이 모였다. 작가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봤었기에 성인, 가족 위주로 돌아가는 주부들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시기였다.


작가는 모임에서 그들에게 첫 문장을 이렇게 보냈다.




"우연히 떨어진 작은 점처럼 우리는 만났다."





그녀는 사람의 얼굴을 그려 보자고 했다. 몇몇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서 그날 주어진 수업 주제 앞에 집중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고, 원망의 대상, 그리움 등 다양한 얼굴들이 빈 종이를 채워나갔다.


저마다 다른 인물, 다른 사연을 그린 가운데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빈 스케치북 하나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빈 스케치북


작가는 스케치북 주인에게 그림을 그리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한참 대답을 망설이던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요.

내가 너무 불행해서
나 말고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요.




굵고 투명한 눈물이 빈 스케치북 위로 빗물처럼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데 이들끼리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것일까?



<그림책이라는 산 / 고정순 122p>









[ 나 다 운 이 야 기 ]


우리에겐 나만의 하얀 스케치북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무엇을 쓸지_

무엇을 그릴지_


아무도 보고 싶지 않고 불행한 자신만 떠올려낼 그 순간을 마주했야 했다.

불행할수록 사람들 틈에 기대거나 숨지 말고 홀로 빈 스케치북에 쏟아야 했다.


하얀 스케치북에 떨궈진 눈물이 그려낸 그림.

마르면 사라질 그 흔적은 처음과 달리 조금 더 단단한 곡선을 만들어낸다.

흘린 자만이 볼 수 있는 마음이 그려낸 보이지 않는 작품.


그녀가 만나고 그리워했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끄떡없을 것만 같은 강인한 아줌마'가 아닌 '스스로를 사랑하고 싶은 여자'였다.


수많은 말보다 토해낼 수 있는 봉지나 쏟아지는 것을 새겨낼 커다란 종이를 펼쳐주는 일. 그래도 괜찮다고. 부끄러워 말라고. 울다 웃어 엉덩이에 털이 나더라도 괜찮다고.


그게 나라고.





#나다운이야기 #나다운필사 #감동적인글 #그림책이라는산고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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