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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ㅂ ㅏ ㄹ ㅐ ㅁ Sep 18. 2021

부부 사용법

깨질 수 있으니 조심히 다뤄주세요





그날은 결혼 후 내 첫 생일이었다.

우리는 친구 부부와 뮤지컬 공연 약속이 있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한 시간 남았다. 차를 타고 움직이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선물 고르는 시간은 30분이다. 그 시간 안에 그는 나에게 선물을 사주고 싶어 했다. 나는 타이트한 시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생일선물을 줘야 마음 편해할 그를 위해 선물을 고르러 갔다.


"마음에 드는 거 없어?"

그는 뭐든 사줄 듯이 물었다.


"잘 모르겠어~ 그냥 다음에 사자~"

나는 촉박한 시간에 아무거나 사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생일인데 천천히 더 살펴봐~"

그는 다시 한번 다정하게 말했다. 반드시 오늘 이곳에서 선물을 사야 할 분위기였다. 


"하아.. 시간 없는데.." "그냥 다음에 사러 오자~"

약속 시간 어기는 걸 싫어하는 나의 목소리에 짜증이 담겼다. 마음속에는 미리 선물을 준비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이 들어차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 기분을 말과 딱딱해진 표정으로 드러냈다.


"징징 거리지 좀 마~"


순간 일정한 리듬으로 뛰고 있던 심장이 멈춰 섰다가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조금 전 바라보았던 배경이 순식간에 색을 잃었다. 우리 사이에는 정적이 함께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곳에서 나와 약속 장소를 향해갔다. 서로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의미 없이 붙잡고 있는 손 사이로 그의 땀만이 초조하게 흘렀다. 

친구 부부를 만나 아무렇지 않은 듯 간단한 대화를 나눈 뒤 공연을 보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우와~ 멋지다'며 눈에 별 백 개를 박아 초롱 거렸을 나는 '징징 거리지 좀 마~'라는 그의 말만 머릿속에 붙들고 되뇌고 있었다. 


'그냥 아무거나 살 걸 그랬나?' '짜증 내지 말고 말할 것을..' '그래도 어떻게 징징거리지 말라고 말할 수 있어?' 화해하고 싶은 나와 불쾌했던 내가 마음속에서 신경전을 벌였다.


어느새 공연이 끝났다. 

'아.. 생일이고 뭐고 그냥 집에 가고 싶다..' 불편한 마음으로 친구 부부와 아무렇지 않은 듯 보내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럽다. 이벤트를 한다. 무대 위에서 배우가 하얀 티셔츠를 흔들며 외쳤다.

'오늘 특별한 날이신 분~?'

저마다 갖은 이유로 손을 들어 소리쳤다. 



'저요~~ 제 와이프 생일이에요~!!'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폴짝 뛰며 손을 높이 치켜들고 흔들고 있다. 제일 뒷자리라 목소리가 그곳에 닿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수많은 이들이 특별한 날이었던가.. 끝내 그의 목소리는 선택되지 않았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안에 엉켜있던 수많은 감정과 말들이 긴장을 풀었다. 번쩍 일어나


'가자~!!'

나는 꽤나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이후 우리에겐 사용법이 생겼다. 

김 00 사용법(그)-효자니까 시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조심할 것, 배고프면 예민하니 피하거나 먹을 것을 빨리 내밀 것, 말에 상처 받는 편이니 예쁜 말로 순화해서 전달할 것, 목소리에 힘없는 날엔 소주 한 병 식탁 위에 올려둘 것, 말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편이니 지루해도 진중하게 들어줄 것(잘 들어주면 혜택이 있음-휴식 시간을 줌), 가정에서 소외되는 걸 싫어하니 함께 할 수 있는 놀이 권해 줄 것, 칭찬받으면 못하는 게 없음. 



최 00 사용법(나)- 친정 이야기에 예민하니 조심스레 접근할 것(수도꼭지 열릴 수 있음), 같은 소리 반복을 싫어하니 잘못한 건 세 번 걸리지 말 것, 잠이 부족하면 인상 찌푸리니 잘 때는 건들지 말 것, 기분 안 좋을 때는 '아이스 카페 모카' 사다 주면 기분 업됨, 남편이 아이들과 잘 놀면 반찬이 달라짐, 서점에 데려가면 소녀가 됨.



그날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우리 부부 사이에도 누구나 겪을 만한 사소한 것에서 큰일들까지 다양하게 거쳐갔지만 그날 '말'이준 교훈으로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그에게 하지 않았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에게 알려주었다. 


서로의 마음이 어긋나는 날에는 대화를 멈추고 불편하지만 침묵을 택했다. 침묵하는 시간 동안 집안의 공기는 낮게 가라앉는다. 그 공기를 정화시키기 위해 서로의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인다. 서로가 원하는 방향으로의 결정을 위해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려 애쓴다. 수없는 반복 끝에 우리는 조금 더 빨리 침묵의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말 하지 않기!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상대에게 해주는 시작이 우리가 서로를 품어줄 수 있는 언어의 시작이 아닐까_



흔히들 말한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작은 사랑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이 아닐까

언어의 온도_이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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