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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ㅂ ㅏ ㄹ ㅐ ㅁ Oct 22. 2021

내게 바람은 불륜이었다_

바람이 진짜 바람이 되었다.


바람이 분다. 바람에 대해 생각하는 날이 늘었다. 

바람이 다가온다. 마치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기라도 하려는 듯 주변을 맴돈다.



바람...



내게 '바람'은 곧 '불륜'이었다.


가정을 지키려는 한 사람을 두고 혼자만의 감정에 몸을 실은 채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자. 불륜이 구체적인 사실이 되면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날아간다. 그 안에 거센 바람을 피해 안전할 사람은 없다. 화창한 날 집안에 태풍이 지나간 자리를 보며 왜 불륜을 바람이라 칭했는지 알게 되었다. 태풍의 영향권에 든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먹구름은 쉽사리 내 집 위를 떠나지 못했다. 집은 여름이 지나도 눅눅함을 벗질 못하고 낮과 밤 말고는 그 어떤 계절도 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계절이 집을 비켜갔다.



지긋한 대문이 박살 나던 스무 살이 되던 해. 대학 진학을 핑계로 단출한 가방 하나 들고 그곳을 떠났다. 해방감과 죄책감이 가방 지퍼 손잡이에 매달린 채 속없이 달랑거렸다. 외로운 타지 생활이 떠나온 집보다 힘들게 여겨지지 않아 더 쓰린 날들이었다.




나는 '바람'이라는 단어를 피해 다녔다. 바람이 좋은 날을 공기가 좋은 날이라 돌려 말했고, 거센 비바람이 창을 두드리는 날이면 급히 잠을 청했다.



내 안에 '바람'의 피가 흐를까 두려웠다. 이 마음을 고백했던 모임에서 한 여자분이 나를 보며 서럽게 울었다. 사정은 이랬다. 시아버님이 바람을 피워 남편 역시 그럴까 무서워하다 우울증에 걸려 약을 먹는 중이라고 한다. 내 두려움이 상대에게 다른 두려움이 된다는 걸 확인한 순간 내 안에 있던 물기가 순식간에 말랐다. 아빠에 이어 오빠까지 바람이 불었던 내 핏줄의 역사가 내게도 이어질까 두려웠던 마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리를 박차고 남편에게 달려가 '당신도 나를 보며 걱정되느냐' 묻고 싶었지만 친정의 욕을 내보이면 그가 나와 친정식구들을 하찮게 여길까 봐 아무 말 없이 등 뒤에 안겨 눈물을 삭혔다.




오늘도 어김없이 바람이 분다.


이 바람은 어떤 의미를 가진 단어일까?


결혼 후 10년 동안 바람이 부는 날이면 나를 지워내 버릴 것 같은 바람에 나부꼈다. 불어오는 바람에 엉킨 머리칼은 매듭이 되고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들러붙은 껌을 잘라내듯 끊어내고 싶은 기억에 뿌리를 두고 자라는 나를 도려내기로 한



어느 날,


남편과 친한 지인(선배 부부)과 만난 자리였다. 잔잔한 일상 이야기 사이로 나에 대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오빠가 셋이나 되면 다들 부럽고 색다른 답이 나오리라 여긴다. 그날도 그랬을 뿐이다.



"오빠들은 뭐해?"



머릿속에 오빠들의 근황을 떠올려보다 불쑥 내뱉었다.

"바람의 자식이라 이혼했어요."


잠깐의 정적안에 당혹감이 쌓여갔다.


"뭘 또 그렇게 말해~"

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지인에게 말했다.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자꾸 둘러대게 되는데.. 그게 더 힘들어요.." 

숨기는 게 많으면 드러낼 게 없어진다는 것을, 한번 둘러댄 거짓이 진실을 더 아프고 악하게 만든다는 것을 답한 후 알게 되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워 감춘 이야기들이 나를 공격하고 그 미움을 더 키워가고 있었다. 그 이후 나는 누군가 묻는다면 점심 메뉴 말하듯 심플하게 답한다. 잠시 불편한 기류가 흐르지만 그건 그저 남의 이야기일 뿐이고, 내 이야기는 예기치 않게 그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마법을 부린다.



바람이 다른 의미를 털어내고서야 나를 스치는 모든 바람을 오롯이 느낀다. 바람이 일깨우는 사물들의 소리를 듣고, 온도를 달리 한 바람과 어우러지는 옷을 입고 함께 걷게 되었다.




사실을 말한다는 건.


진실까진 아니더라도 일어난 것에 대한 사실을 써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인지 알아간다.

여전히 끌어내야 할 사실들이 많지만 구태여 헤집을 필요가 있을까? '바람'을 좋아하게 되면서 내 안에 있던 다른 의미의 '바람'이 불어 나왔듯 자연스럽게. 그렇게 세어 나오는 나를 만날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


바람이 분다.

너를 느낄 수 있는 나는 비로소 두 팔 벌려 너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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