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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ㅂ ㅏ ㄹ ㅐ ㅁ Dec 08. 2021

막내는 첫째가 되었다

무게





"오빠가 셋이나 되는데 왜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돼?"



적당한 답을 들을 리 없는 물음표가 허공에 뿌려졌다. 단 한 번도 상대를 앞에 두고 뱉지 못한 불덩이 었다. 혹 뱉게 된다면 상대의 가슴을 지져 살타는 냄새를 맡게 될 것이었다. 다행히 여태껏 살타는 냄새는 못 맡았지만 덕분에 내 안은 늘 뜨거웠다.


오빠가 셋이나 되는 나는 동화 속 공주처럼 떠받들며 자랐을 거라는 일반적인 생각에서 멀리 있었다. 안타깝게도 오빠들이 데리고 다니며 살뜰히 챙길 만큼 예쁘지도 여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살고 있던 섬에서 육지로 학교를 가버린 오빠들의 부재는 미운 정 고운 정 들 새도 없이 짧았다. 그렇게 우리는 10년도 채 되지 않는 옅은 기억을 안고서 평생 이어갈 가족으로 묶였다.


시골에 혼자 남아 가장 싫었던 건 오빠들의 전화를 받아 부모님께 전하는 일이었다. 도시에서 자취하며 학교생활을 하는 오빠들은 주기적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부탁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가 오는 시간은 부모님이 들에 일하러 나가고 안 계실 때였다. 오빠들은 내게 돈이 필요한 목적과 금액을 남겼고, 나는 어느 타임에 말을 전달해야 하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용건을 말하고 끊은 오빠들은 내게 남겨진 무게를 알고 있었을까? 전화 횟수가 늘어날수록 기르던 소가 팔려나가고, 밭이 남에게 넘어갔다. 팔려나가는 게 물건이면 좋으련만 자식 교육에 열심인 아내가 지긋해진 아빠의 마음도 팔려나갔다. 재산이 빚으로 바뀌고 집은 잿빛으로 변해간 건지 내 마음이 잿빛이 된 건지 구별을 할 수 없었다. 집은 제 기능을 잃은 채 고함과 비명, 적막, 울음으로 채워갔다.


모든 게 팔려나가는 걸 혼자서 지켜봐야 했다. 자식을 위해 돈을 마련하는 엄마의 비굴함을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했고, 엄마를 연민하는 대신 미워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모든 게 엄마의 욕심에서 비롯된 거라고 떠밀어야 숨 쉴 수 있었다. 그 잠깐의 숨은 시간이 지나 엄마의 지옥을 방관했던 죄인의 숨결로 변해갔다. 그런 마음 알턱 없는 엄마는 '너희들을 위해 참고 산다'며 그 기나긴 밤을 도와줄 이 없이 견뎌냈다. 우리는 누구 하나 행복할 수 없이 썩어갔다. 자신의 희생이 반드시 빛을 볼 거라는 믿음 하나로 버틴 엄마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던 아빠의 이탈은 길고도 추웠다.



집을 나서 사고가 나면 가족에게 연락이 온다.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선 아빠가 길을 잃고 다시 되돌아오던 겨울은 내게 따듯했는지 싸늘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따듯했다면 어린 시절 내 우상이었던 아빠를 다시 되찾은 것이었고, 싸늘했다면 다시 시작될 엄마의 고단한 삶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 자식들 결혼식에서 부모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엄마는 또 한 번 이를 앙물고 세월을 살아냈다. 그 덕에 나는 아빠 손을 잡고 발맞춰 식장에 들어섰다. 친정엄마가 울면 흠이 될까 싶어 굳게 다문 입으로 흘러내린 엄마의 눈물은 그 순간을 위해 견뎌온 세월에 대한 위로였다.



결혼 후 내 가정이 생기자 아무것도 침범할 수 없게 나무를 하나씩 박아 울타리를 쳤다. 남편은 몰랐지만 나는 그 나무 하나하나를 알고 있었다. 첫째가 잘 돼야 동생들도 잘 풀린다며 해달라는 돈을 없는데도 있게 만들어 키워 낸 엄마의 첫째. 내겐 큰오빠. 쉽게 얻은 돈으로 쉽게 잃은 돈들은 또다시 돈을 구할 곳을 찾았다.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내키지 않은 돈거래는 결국 서로를 망치게 했다. 그렇게 우리는 호적에 같이 있을 뿐 현실에서는 닿지 않을 만큼 멀어졌다.



피해자만 존재한 가족.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누구 탓인지도 모른 채 굳어갔다. 첫째 오빠의 이혼, 결혼하지 않은 두 오빠를 두고 나만 정상이라 불리는 가족을 이뤘다. 그리고 막내인 나는 자리잡지 못한 오빠들이 방치한 첫째 자리를 떠안게 되었다. 부모님이 아프시면 병원을 결정해야 했고, 수술에 서명을 해야 했다. 오빠가 셋이나 있는데 첫째 노릇을 해야 하는 딸이 안쓰러워 억지로라도 건강해야 하는 부모님은 감사한 마음보다 버거운 마음이 더 깊었다. 좋은 기억보다 아프고 미안한 기억만 새겨진 내 안을 도려내 새살이 돋아나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시골집이 보인다. 한 때 서로를 향한 미움의 칼날로 난도질했던 두 노인이 적막한 집에 앉아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린다. 어느 날은 검은 먹구름이 그 위에 멈춰 집을 삼키려 든다. 나는 어쩔 줄 모른 채 가슴에서 숨이 빠져나간다. 급히 숨을 쉬고 눈을 뜨면 꿈이다. 부모님을 책임져야 하는 첫째가 돼버린 막내는 그렇게 첫째의 무게를 알아갔다. 그리고 첫째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첫째 노릇하기 힘들었겠다.."


오빠는 그럼 쉬운 줄 알았냐며 피식 웃더니 아무 말 없었다.




우린 가족이면서 가장 멀리 지내고 있다. 언제고 풀어야 할 자신들만의 응어리를 안고 살아간다. 이따금 첫째 노릇 중인 막내 동생의 독한 문자에 답하면서.




"우린 엄마, 아빠 장례식날 만날 것 같아. 그때 만나면 디지게 싸우다 헤어지겠지. 우리 그때 만납시다!!"


엄마가 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혼자서 간병을 도맡고, 어린 두 아이만 두고 나온 집을 오가며 쌓여버린 가슴속 불덩이였다. 그 열기를 그대로 담아 오빠들에게 보내고서야 나를 태우던 열기가 조금 식었다.

어릴 적 막냇동생만 기억하던 오빠들은 다 자라 무서운 말도 하는 여동생을 그제야 다독인다. 그 작은 다독임에 속없이 미움이 가셨다. 혼자라 무서웠던 거였다. 함께 나누고 싶은데 퍽퍽한 오빠들의 삶까지 내 어깨에 얹힐까 두려웠다.


나는 오늘도 첫째다.

이 무게를 통해 내 딸에게 첫째의 숙명을 새기지 않으려 한다. 그 무게가 가진 외로움을 알기에. 동생과 나눠지게 한다. 나 역시 일찍 오빠의 무게를 이해하고 서로 가진 마음을 나누지 못함이 아쉽기에. 이 아쉬움은 너무 늦지 않게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다.



우리는 모두 그저 자식일 뿐이다.

고른 사랑을 받고 싶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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