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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ㅂ ㅏ ㄹ ㅐ ㅁ Jan 13. 2022

27_50

나다운 필사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버려야만 더 큰 것을 얻는다]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금세 친구가 된다. 




나다운 필사 / 나다운 이야기 / 친구사이에 나이는 중요치 않다. 



[ 나 다 운 이 야 기 ]


입보다 눈이 먼저 말을 건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눈에 익은 책등이 보인다. 이끌리듯 걸어간다. 주변을 조용히 감상한다. 머릿속에 우리 집 책장 어디쯤에 저 책등이 보이는지 자동적으로 따라붙는다. 안면이라도 있는 사이처럼 책 등을 눈으로 쓰다듬으며 미소로 인사를 나눈다. 나는 더 이상 그 공간이 어색하지 않다. 


두 아이를 데리고 도서관을 가면 아이들은 빌려갈 새로운 책을 찾는 것보다 집에 있는 책 찾기 놀이를 한다. '어? 이거 우리 집에 있는데!' 아이들 머릿속에도 우리 집 책장이 떠올랐을 것이다. 아이들은 익숙해진 공간에서 비로소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선다. 


공간과 그 공간에 머무는 사람과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금세 친구가 된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과 금세 친해진다. 




스물여섯에 시작한 병원에서의 직장생활이 스물일곱에 접어들었을 때다. 낮에는 친절로 나를 가리고 밤에는 쓸쓸함에 술로 나를 재우던 날들이었다. 이유를 나열하자면 무수했을 테지만 당시엔 이유 없는 답답함에 앞에선 해님처럼 뜨겁다가도 뒤돌아서는 달처럼 차가워졌다. 낮이었고, 나는 뜨거운 해였고, 친절했을 시간에 만난 환자분이 있다. 소녀 같은 미소를 가진 그녀는 조용히 치료만 받고 되돌아갔다. 어느 순간 우리는 뜨끈한 콩나물국밥 앞에 소주 한 병을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 뜨거운 국물이 속을 데우고 차가운 소주가 속을 식혔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국밥에 피어오르는 김이었다. 공허하게 사라지고 옅게 스며드는. 


그녀와 나는 스무 살 넘게 차이가 났다. 마주 보며 어이없어 웃다 멋쩍을 때면 잔을 부딪혔다. 그렇게 쉰 살의 소녀와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아들에게 나를 친구라고 소개했다. 해맑은 그녀의 목소리가 아들에게 닿았고, 아들은 그런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엄마가 또래 여자아이와 친구가 되어 밥 먹고 술 마시는 게 어이없었을 법도 한데 아들은 매번 가벼운 목례로 알 수 없는 마음을 표했다. 쉰 살의 소녀와 스물일곱 소녀는 가족에게 동의받은 합법한 친구사이가 된 거라 믿었다. 우리는 포장되지 않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나눴을까?? 

어느 날 쉰 살 소녀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른 채 나는 제 나이로 돌아왔다. 뜨거운 콩나물 국밥에 해장하면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이 오르면 그 너머에 앉아있던 고요한 친구를 그리워했다. 내 나이가 마흔을 넘어서자 잊고 있던 그 시절 쉰 살 소녀가 다시 떠올랐다. 서른 즈음 처음으로 '나는 외롭다'라고 일기를 썼다. 막힌 숨이 일기장을 구깃하게 만들 만큼 쏟아져 나왔다. 마흔 너머 '나는 고독이 좋다'라고 일기를 썼다. 그리고 그날의 우리가 앉은자리에 함께 했던 것들을 깨달았다. 


쉰 살 소녀는 고독했고, 스물일곱 소녀는 외로웠다는 걸. 외로움과 고독이 앉아 마신 술 한잔이 애달프게 그립다. 쉰 살 소녀가 여전히 소녀로 살아가길.. 아들의 애틋한 눈빛을 받지 않길.. 고독과 어엿한 벗이 되었기를 바란다. 


나는 고독을 품은 사람과 금세 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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