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중학생 딸
한라산 성판악 코스 후기
2025.12.12
새벽 4시 기상.
전날 대여한 운동화와 스틱, 가방을 하나씩 챙긴다.
말은 많지 않지만, 준비는 정확하다.
아빠와 중학생 딸.
한라산 성판악 코스를 오르기 위한 하루의 시작이다.
이건 내가 아닌
그와 딸의 이야기다.
전일(12.11) 예약했던 한라산은
비가 내려 결국 취소.
오를 수밖에 없는 날짜는 12.12로 변경됐다.
그마저도 강풍 예보.
또 취소될 수도 있겠구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제주도.
예보와 현지인들의 예상과 달리
그날, 바람은 불지 않았다.
장비 렌탈 샵에서는
“빌려두셔도, 한라산 입산이 금지되면
전액 환불 가능합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알게 됐다.
팁.
정말 오르고 싶다면
그날의 한라산은
끝까지 기다려봐야 안다는 것.
사실,
나라면 기상예보를 믿고
이미 취소했을 테니까.
중학생 딸과 아빠는
성판악 코스 도전을 세웠다.
큰 목표는 백록담.
작은 목표는
함께 시도했다는 경험.
말과 종이에 세우는 목표는
참 쉽다는 걸…
하핫 ;;
그래서 더,
몸으로 걷는 하루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들은
새벽 기상 후
성판악 코스와 가까운 주차장,
선착순 100대 안에 들었다.
주차를 마쳤을 때
남아 있던 자리는 16대.
평일이 이 정도라면
주말은
훨씬 더 서둘러야
주차가 가능하겠다.
12월 제주 영상들을 보고 온 터라 설산을 상상했는데,
12월 초반의 제주는 의외로 날씨가 좋았다.
딸이 앞서고, 아빠가 뒤를 따른다. ㅋ
걷고 걷고 걷고 걷고 걷고 걷고. ㅋ
한라산 후기가
‘이러다 정상입니다!!’로 끝나면 좋으련만.
중1이다.
세 시간 후,
이 지루한 산행에 결국 지치고 만다.
(집 근처 산은 길어야 두 시간이면 등하산을 마치는데,
아직도 초반이라는 말 앞에서 느낄 허탈감—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초입이 비교적 완만해 보였던 건 착각이었다.
아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1차 포기 소식.
그래.
아빠와 제주도에 오고,
새벽 기상까지 감수하며 시도한 것들.
훗날 아쉬워할 걸 알면서도
나는 ‘괜찮다’를 전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새 소식.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포기 선언 후 500m를 내려와
쉼터에 앉아 잠시 쉬던 그들.
아빠 역시 나와 같은 마음으로
목표 수정을 제안했다고 한다.
백록담이 아닌,
30분만 더 오르면 되는 곳.
솔밭 대피소 도착!!!!
중학생 딸의 꿀팁.
쉼터와 대피소에서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
빨리 오른 사람도
결국 쉬었다 가는 사람과
어딘가에서 만나게 되더라는 것.
역시 산은 스승이다.
역시 산은 공식이다.
그 공식을 어떻게 대입해 살아갈지는
또 다른 몫이지만,
그 재료를 품고 살아가는 일.
(참고로 나는 한라산에 가본 적이 없다. ^^;;)
2차 목표 수정.
솔밭대피소를 달성한 뒤,
먹고, 쉬고,
다시.
백록담 도전.
다시 시작이라고 해서
희망이 줄곧 불끈 솟는 건 아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처럼,
마음만 먹는다고 쉬이 내어주지 않는다.
솔밭대피소 이후,
얼음길이 등장한다.
아이젠을 장착하고
더 큰 경사를 오른다.
3차 위기 발생
달리 방법이 없다.
산에 오른 이상,
오르거나 내려가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
아이는 말한다.
너무 힘든 순간,
조금 다쳐서 하산의 핑계가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충분히 이해된다.
나 역시 힘든 순간마다
내가 아닌 어떤 상황을 통해
벗어나고 싶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부모와 자식,
모든 관계는 동등하다.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순간이 있다.
그 와중에도
아빠와 사진은 찍어준다.
(돌아와 들으니,
이때 꽤 짜증이 났지만
나중에 사진을 돌아볼 걸 생각해
찍었다고 한다.)
이렇게 후기가 훈훈하면 좋겠지만,
굽이굽이,
고비고비.
위기가 찾아온다.
굳은 의지를 가지고
직접 한라산 등반을 다짐하지 않고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들이
쉼 없이 고개를 든다.
딸도 햄스터 분양 의지를 말했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아빠를 위해서였다.
아빠를 위한 다짐이었으니
정상이 아니더라도
그 시도와 마음만으로도
인정되길 바라는 마음.
(사춘기 녀석들은
이 지점에서
목소리가 날카로워진다.)
경험상,
이럴 때는
살짝 입을 닫고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도
그 역시 기다렸다고 한다.
마지막 대피소,
진달래밭 대피소.
그곳에서 컵라면과 김밥.
(보온병을 챙겨갔다.)
꼭 추천한다.
컵라면은 먹어줘야 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아이는
더 이상 힘내는 게 싫었다고 한다.
내려갈 걱정,
케이블카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
내가 원해서 온 한라산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한마디로,
빡쳤다는 거다.
그 순간 남편은
부탁을 했다고 한다.
(고지가 눈앞인데…
내려갈 수는 없지…)
진짜 아빠를 위해
마지막 힘을 내달라고.
딸은 결국
오기로 남은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 남편이
딸에게 아래를 보라고 했다고 한다.
오르는 내내
땅만 보고 걷던 아이.
그 말에 고개를 들었을 때,
구름이 발아래에 있었다.
자신이
구름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다시 힘이 났다고 한다.
백록담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백록담을 본다.
4년 전,
그는 안개에 가려
백록담을 선명히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너무 맑고 좋았다고 한다.
흑흑흑.
인생 다큐도 아니고,
한라산 등산이
이런 감동 드라마일 줄이야.
정말,
그들의 산행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발을 풀어 환기시키고,
이제 다시 내려갈 일.
올라오는 일도 중요하지만
내려가는 일은 더 중요하다.
마무리니까.
모든 일에는
마무리가 있다.
관계도,
등산도,
일도,
인생도.
내려오는 길은
성판악이 아닌
관음사 코스를 택했다.
조금 더 가파르긴 했지만,
새로운 길과
시간 단축을 위해서다.
차는 성판악 주차장에 있어
관음사에서 택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관음사 → 성판악
카카오택시 14,500원)
그리고,
인증서.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뭉클했다.
해냈다는 안도감과
기특함.
말보다 먼저,
마음이 먼저 울컥했다.
이제 우리에게 제주도는 그냥 제주도가 아니고, 한라산은 그냥 한라산이 아니다.
공식이다.
포기했던 순간, 울었던 순간, 기다리던 순간, 그럼에도 걸을 수밖에 없던 순간.
그 모든 순간의 합.
남편은 말한다.
이번 제주도 여행을 통해 진짜 어른, 아빠가 된 느낌이라고.
아이가 자라며 변하듯, 부모도 그에 맞게 변해가야 한다는 것까지 얻었다면 너무 큰 억지일까.
그런데 어쩌랴.
사실인걸.
집에 돌아와 그날을 떠올리면서 웃고 떠든다. 그들 사이 전우애가 싹텄다.
그날 한라산을 그들을 허락했고 기다렸고 모습을 선명히 보여줬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좌석이 달랐던 그 둘.
그는 딸에게 장문의 톡을 남기며 함께한 제주도와 마음을 전했고, 딸 역시 그에게 장문의 답을 했다.
딸은 등산이 제일 싫다고 밝혔다.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딸과 활동적인 것을 꿈꾸는 아빠에게 늘 미안했던 마음이 있던지라 한라산은 함께 가주고 싶었던 거란다. 그러니 그렇게 힘든 순간 터져 나온 말이 '내가 원해서 온 한라산이 아니라고!'였다.
그러고는 다음에 엄마와 동생도 같이 오른다면 한번 더 해보겠다고 한다.
저질 체력 엄마와 함께면 아마 경력자인 딸은 나를 위해 힘을 낼 거다.
누군가를 위해 힘을 낸다는 건 기적이다.
나를 위한 힘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힘을 내는 일, 그 산에서 눈물, 짜증, 힘듦 속에서도 사랑은 내내 끓고 있었다.
딸을 위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도,
아빠를 위해 한라산을 올라버린 딸도
그 둘을 내내 응원하고 걱정하던 나도
철없이 내년엔 나도 한라산 오를 거라는 열 살 아들도.
한라산 등반을 계획하는 모든 분들 화이팅.
다녀 오신분들은 리스펙!
다음에는 온가족 한라산 등반 기록을 바래봅니다. 저만 잘하면 될 것 같습니다. ^^